상사 잘못에도 비서는 "죄송합니다"…말할 곳 없는 감정노동
입력
수정
여성 비서노동자 분석 논문 "상당수 '우울' 경험…동료들로부터 고립되는 경우도"
전문가 "안희정·박원순 사건은 성폭력이자 노동권 침해…'펜스룰'은 답 아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과 성추행 의혹의 충격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 가운데 피해자인 비서직 노동자의 노동조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통상 비교적 젊은 여성이 중년 남성 임원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업무를 맡는 풍토에서는 성폭력뿐 아니라 수직적 권력 관계나 성 역할, '감정노동'의 문제 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여성 비서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겪어온 다층적 고충을 기록한 논문도 새삼 주목을 받는다.
김민아(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박사과정)씨 등이 지난해 발표한 논문 '비서의 직장 내 감정노동 모델 도출을 위한 질적연구'는 국내외 기업·대학·의료기관에서 다년간 비서로 종사한 20∼30대 여성 21명을 심층면접한 내용을 분석한 결과물이다. ◇ "수직 관계 속 부당한 지시 참아야…'하는 일 없다'는 인식도 스트레스"
26일 논문에 따르면 한 외국계 기업에서 외국인 임원의 비서로 일하는 A씨(30대·7년차)는 자신이 보좌하는 상사의 말 바꾸기 때문에 애를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A씨는 "(상사가) 화를 내며 '나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 (이미 준비를 마친 일을) 처음부터 다 바꾸라'고 해 3일 남은 상황에서 처리해야 한 적이 있다"며 "여러 명이 들었던 상황인데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고 나 몰라라 식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동안 일한 시간도 아깝고, 지시한 대로 일을 해 온 건데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이라며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상사라 표현하지 못한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국내 어느 기업의 비서로 재직한 B씨(30대·3년차)도 "나는 (미리) 설명을 했지만 그냥 '죄송하다' 내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 따질 수는 없으니까, 그럴 때 스트레스를 받고 억울하다"고 했다.
논문은 "비서는 상사와의 수직적인 권력관계에서 상사의 비인격적인 행동, 부당한 지시도 참아야 했다"며 "남성 상사의 상습적 성희롱에서 자유롭지 못한 비서도 있었다"고 밝혔다.
H씨(30대·9년차)가 비서로 일한 대학이 그런 경우다. 그는 "제 전임은 (실제 성희롱을) 경험했고, 직장 분위기도 '그럴 수도 있다'는 분위기"라며 "어떤 분은 여자 직원을 술집 여자 대하듯 해 (나는) 사전에 피했다"고 말했다.
논문에 따르면 상사를 보좌하는 비서보다 팀 전체를 상대하는 비서가 조직원들과의 관계에 더 어려움을 겪는 경향을 보였다.
'비서는 하는 일이 없다'는 동료의 인식은 비서직 노동자들의 고충을 배가했다.
H씨는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비서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비서라고 해서) 다른 (모든) 사람의 비서가 아닌데, 팀 비서라도 동료로 대해야 하는데, 동료(라는) 인식이 없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 "상당수가 '우울' 경험…비서 감정노동은 개인·조직·사회적 산물"
논문은 응답자들이 부정적 감정을 느꼈지만 동료·가족에게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감정의 부조화로 인한 감정노동'도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외국계 기업에서 일한 비서 O씨(30대·6년차)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을 때, 대놓고 무시할 때, 내 잘못이 아닌데 그만두고 싶은 경우가 많았다"며 "대부분 상사와 비서의 관계는 감정받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국내 기업에서 임원 비서로 일한 J씨(30대·7년차)는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생각하다 혼자 집무실을 나와서 울었다"면서 "익숙해지면서 극복이 됐고, 나한테 화가 난 게 아니라고 인지하면서 괜찮아졌다"고 했다.
결국 이런 부정적 감정은 직장 바깥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국내 로펌에서 비서로 일한 A씨(30대·9년차)는 "내 자존감이 낮아지고 관련 기사도 많이 찾아보고 병원에 가야 하나 생각할 정도까지 됐다"고 했다.
'우울감'은 응답자 상당수가 경험했다.
외국계 기업에서 외국인 임원 1명과 팀을 보좌한 F씨(30대·7년차)는 "기분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어 내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느껴졌다"며 "남편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비서면 무조건 상사 말을 따르라'라거나 내가 '을'이라고 해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논문은 "조직원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립, 비서 업무 특성 요인, 직급 체계, 조직문화 등의 비서직 근무 조건과 환경, 비서의 비정규직화 및 승진체계 등 사회구조적 요인, 비서직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 감정을 만드는 맥락적 조건"이라며 "비서의 감정노동은 개인·조직·사회의 원인이며 결과"라고 주장했다. ◇ "잇단 성폭력은 기득권 세대가 비서 역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드러낸 것"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안희정·박원순 사건은 성폭력일 뿐 아니라 비서인 노동자가 온전하게 노동할 권리를 침해당한 것이기도 하다"며 "권력을 가진 세대가 비서의 역할과 업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성중심적 조직 구조 속에서 비서는 대체로 젊은 여성으로서 업무능력보다는 일정한 성 역할을 강요받는 것으로 보인다고 서 이사는 판단했다.
그는 '성폭력 문제가 자꾸 발생하니 아예 여성을 비서로 채용하지 말자'는 '펜스룰'이 일각에서 제기되는 것에 대해선 "자신과는 다른 사람, 다른 환경을 가진 사람과 함께 지내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비서실에서) 여자를 다 없애자', '(밖에서 사무실 안이 보이도록) 유리창을 만들자' 등의 이야기는 여성의 존재 자체를 '위협'으로 인식하는 것"이라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자격도 없는 발언"이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전문가 "안희정·박원순 사건은 성폭력이자 노동권 침해…'펜스룰'은 답 아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망과 성추행 의혹의 충격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 가운데 피해자인 비서직 노동자의 노동조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통상 비교적 젊은 여성이 중년 남성 임원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업무를 맡는 풍토에서는 성폭력뿐 아니라 수직적 권력 관계나 성 역할, '감정노동'의 문제 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여성 비서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겪어온 다층적 고충을 기록한 논문도 새삼 주목을 받는다.
김민아(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박사과정)씨 등이 지난해 발표한 논문 '비서의 직장 내 감정노동 모델 도출을 위한 질적연구'는 국내외 기업·대학·의료기관에서 다년간 비서로 종사한 20∼30대 여성 21명을 심층면접한 내용을 분석한 결과물이다. ◇ "수직 관계 속 부당한 지시 참아야…'하는 일 없다'는 인식도 스트레스"
26일 논문에 따르면 한 외국계 기업에서 외국인 임원의 비서로 일하는 A씨(30대·7년차)는 자신이 보좌하는 상사의 말 바꾸기 때문에 애를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A씨는 "(상사가) 화를 내며 '나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 (이미 준비를 마친 일을) 처음부터 다 바꾸라'고 해 3일 남은 상황에서 처리해야 한 적이 있다"며 "여러 명이 들었던 상황인데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고 나 몰라라 식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동안 일한 시간도 아깝고, 지시한 대로 일을 해 온 건데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이라며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상사라 표현하지 못한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국내 어느 기업의 비서로 재직한 B씨(30대·3년차)도 "나는 (미리) 설명을 했지만 그냥 '죄송하다' 내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 따질 수는 없으니까, 그럴 때 스트레스를 받고 억울하다"고 했다.
논문은 "비서는 상사와의 수직적인 권력관계에서 상사의 비인격적인 행동, 부당한 지시도 참아야 했다"며 "남성 상사의 상습적 성희롱에서 자유롭지 못한 비서도 있었다"고 밝혔다.
H씨(30대·9년차)가 비서로 일한 대학이 그런 경우다. 그는 "제 전임은 (실제 성희롱을) 경험했고, 직장 분위기도 '그럴 수도 있다'는 분위기"라며 "어떤 분은 여자 직원을 술집 여자 대하듯 해 (나는) 사전에 피했다"고 말했다.
논문에 따르면 상사를 보좌하는 비서보다 팀 전체를 상대하는 비서가 조직원들과의 관계에 더 어려움을 겪는 경향을 보였다.
'비서는 하는 일이 없다'는 동료의 인식은 비서직 노동자들의 고충을 배가했다.
H씨는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비서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비서라고 해서) 다른 (모든) 사람의 비서가 아닌데, 팀 비서라도 동료로 대해야 하는데, 동료(라는) 인식이 없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 "상당수가 '우울' 경험…비서 감정노동은 개인·조직·사회적 산물"
논문은 응답자들이 부정적 감정을 느꼈지만 동료·가족에게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감정의 부조화로 인한 감정노동'도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외국계 기업에서 일한 비서 O씨(30대·6년차)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을 때, 대놓고 무시할 때, 내 잘못이 아닌데 그만두고 싶은 경우가 많았다"며 "대부분 상사와 비서의 관계는 감정받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국내 기업에서 임원 비서로 일한 J씨(30대·7년차)는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생각하다 혼자 집무실을 나와서 울었다"면서 "익숙해지면서 극복이 됐고, 나한테 화가 난 게 아니라고 인지하면서 괜찮아졌다"고 했다.
결국 이런 부정적 감정은 직장 바깥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국내 로펌에서 비서로 일한 A씨(30대·9년차)는 "내 자존감이 낮아지고 관련 기사도 많이 찾아보고 병원에 가야 하나 생각할 정도까지 됐다"고 했다.
'우울감'은 응답자 상당수가 경험했다.
외국계 기업에서 외국인 임원 1명과 팀을 보좌한 F씨(30대·7년차)는 "기분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어 내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느껴졌다"며 "남편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비서면 무조건 상사 말을 따르라'라거나 내가 '을'이라고 해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논문은 "조직원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립, 비서 업무 특성 요인, 직급 체계, 조직문화 등의 비서직 근무 조건과 환경, 비서의 비정규직화 및 승진체계 등 사회구조적 요인, 비서직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 감정을 만드는 맥락적 조건"이라며 "비서의 감정노동은 개인·조직·사회의 원인이며 결과"라고 주장했다. ◇ "잇단 성폭력은 기득권 세대가 비서 역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드러낸 것"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안희정·박원순 사건은 성폭력일 뿐 아니라 비서인 노동자가 온전하게 노동할 권리를 침해당한 것이기도 하다"며 "권력을 가진 세대가 비서의 역할과 업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성중심적 조직 구조 속에서 비서는 대체로 젊은 여성으로서 업무능력보다는 일정한 성 역할을 강요받는 것으로 보인다고 서 이사는 판단했다.
그는 '성폭력 문제가 자꾸 발생하니 아예 여성을 비서로 채용하지 말자'는 '펜스룰'이 일각에서 제기되는 것에 대해선 "자신과는 다른 사람, 다른 환경을 가진 사람과 함께 지내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비서실에서) 여자를 다 없애자', '(밖에서 사무실 안이 보이도록) 유리창을 만들자' 등의 이야기는 여성의 존재 자체를 '위협'으로 인식하는 것"이라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자격도 없는 발언"이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