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의 디지털 진화…AI 패션앱이 신상 1만개 5분내 주문
입력
수정
지면A18
사입삼촌 사라진 동대문 가보니지난 24일 금요일 밤 12시. 서울 동대문 새벽시장으로 유명한 디오트 상가빌딩 앞.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요일 휴점을 하루 앞두고 늘 수백 명의 ‘사입삼촌(도매 의류의 주문·배송을 대행하는 중간 상인)’으로 북적이던 곳이 한산한 풍경이었다. 사입삼촌들은 10여 명뿐이었고, 상가 안쪽 복도엔 옷 무더기만 잔뜩 쌓여 있었다. “장사가 잘 안 되냐”는 질문에 인근 상인은 “무슨 소리냐. 요샌 다 앱으로 주문하기 때문에 사람이 필요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중국 등 수출은 끊겼지만 국내 온라인 매출은 오히려 늘었다”고 답했다.
AI·빅데이터 기반 제2 전성기
10여개 패션 스타트업 경쟁중
전국 30만 도·소매상 실시간 연결
재고관리 고도화 '하루배송' 시대
브랜디 "내년 해외 진출도 검토"
탄탄한 제조 기반이 디지털 변신의 힘
동대문시장은 1950년 근대 최초 시장으로 출발했다. 창신동 봉제골목부터 광희동, 신당동, 동대문종합시장까지 반경 10㎞ 일대를 아우르는 한국 패션산업의 메카로 불린다. 원·부자재 업체부터 원단, 봉제, 도·소매업체까지 3만여 개 업체가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들과 거래하는 전국 소매상 숫자가 30만여 곳. 동대문시장은 원·부자재부터 소매상까지 밀집된 구조 덕분에 매일 1만여 개의 신상품이 쏟아져 나온다. 패션 클러스터로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동대문시장에서는 3년 전만 해도 사입삼촌들이 도매업체에서 만든 옷을 보따리로 짊어지고 매일 밤 땀 냄새를 풍기며 전국으로 나가는 소매상들의 차에 실어줬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사입삼촌이 사라진 자리엔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등 디지털 기술이 들어섰다. 상전벽해(桑田碧海)다.
사입삼촌 대신 패션 앱이 장악
변화가 시작된 것은 3~4년 전부터다. 단단한 제조기반을 눈여겨본 패션 스타트업들이 동대문으로 향했다. 대표적인 업체가 브랜디다. 브랜디는 AI를 활용해 도매상과 소매상을 연결해주는 물류센터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잘 팔릴 만한 옷을 미리 도매상에서 사둔 뒤 소매상을 통해 주문이 들어오면 당일 바로 배송을 시작했다. 빅데이터를 이용해 2~3일 걸리던 배송 기간을 하루로 단축시킨 것. 잘 팔리는 상품만 골라 사둔 덕분에 판매량이 늘고 재고율은 떨어졌다. 전국의 온라인몰 운영자들이 몰려들었다. 올해 매출은 지난해(376억원)보다 세 배 가까이 늘어나고, 첫 흑자도 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서정민 브랜디 대표는 “내년엔 해외 진출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브랜디뿐 아니다. 지그재그와 에이블리, 신상마켓, 키위, 와이즈패션 등 10여 개의 패션 벤처들이 동대문을 기반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신상마켓은 동대문의 도·소매업체를 연결해주는 서비스로 지난해 누적 거래액 1조원을 넘겼다. 신상마켓 이용 도매상은 1만2000여 곳, 소매상은 13만2000여 곳에 달한다. 올해 상반기 거래액만 1858억원. 작년 같은 기간보다 26% 늘었다. 최근 바코드 시스템 등을 도입해 정확도와 배송 속도를 높인 것이 주효했다. 여성 패션 전문몰 지그재그도 지난해 거래액 6000억원을 달성했고, 올해는 1조원을 예상하고 있다.
네이버·벤처캐피털 등 투자 몰려
한성숙 네이버 대표는 “지금 동대문은 예전의 동대문이 아니다”며 “디지털 동대문으로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동대문의 디지털 변신 후 투자금도 몰리고 있다. 신상마켓은 최근 총 255억원의 투자금을 확보했다. 브랜디도 올초 210억원을 추가로 유치해 총 350억원 규모의 투자금 유치에 성공했다. 포털업체 네이버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 대표는 “디지털 기술을 도입하고 젊은 층과 소통하는 동대문의 변화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며 “동대문과 어떤 사업을 함께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네이버는 최근 신상마켓에 전략적 투자를 결정했다.간호섭 홍익대 패션디자인학과 교수(한국패션비즈니스학회장)는 “AI 기술 도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며 “탄탄한 제조 경쟁력을 갖춘 동대문시장이 AI 기술까지 도입했다는 건 세계 시장에서도 통할 만한 경쟁력을 갖춰가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