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K워치] 장기침체 부른다…현금 쌓는 '슈퍼세이버' 경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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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소비·투자를 줄이고 현금을 쌓는 '슈퍼세이버'(super saver)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슈퍼세이버가 속출하면서 경기하강 속도가 보다 빨라지고 장기침체를 부를 것이라는 경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도 지난달 한 기자간담회에서 슈퍼세이버 등장을 우려하면서 “소비·투자의 회복이 더뎌지고 물가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5만원권 등 지폐 선호도도 올라갔다. 지난 6월 말 5만원권 화폐발행잔액은 114조7695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화폐발행잔액은 한은이 시중에 공급한 화폐에서 한은 금고로 돌아온 돈을 뺀 수치로 시중에 남아있는 돈을 말한다.시중에 가계와 기업이 장롱과 금고에 쌓아 놓은 5만원권 지폐가 불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한은의 5만원권 발행액 대비 환수액 비율을 나타내는 환수율도 올 1~6월에 26.9%로 지난해(60.1%)의 절반을 밑돈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시중에 공급한 유동성만 120조원을 웃돌고 기준금리도 사상 최저로 내려갔지만 소비·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단기예금 등으로 금융권에서 머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불거진 집값 과열 사태도 슈퍼세이버 등장에서 비롯했다는 분석도 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가계·기업이 불확실성에 대비한 예비적 동기를 바탕으로 현금을 쌓는 것"이라며 "현금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안전자산 수요도 커지며 현금처럼 안전하다고 인식되는 부동산에 현금이 몰린 것"이라고 말했다. 현금을 쌓는 슈퍼세이버가 늘면서 성장률과 물가가 내려가는 등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당국에서도 나오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달 25일 열린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극단적 위험회피 성향을 갖는 이른바 ‘슈퍼세이버(super saver)’가 증가하고 있다”며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소비와 투자의 회복이 더뎌지면서 물가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각에서는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이 가계와 소비 심리를 위축시켰다고 설명했다. 2018~2019년 최저임금이 2년 새 30% 가까이 올랐다가 2020~2021년에는 연평균 1~2%씩 올리는 것 등이 그렇다. 기업 규제를 풀겠다고 '규제 샌드박스' 정책을 내놓으면서 공정거래법·상법 등 규제를 강화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기업 정책 기조도 기업 투자를 옥죄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5월 한국의 경제정책 불확실성(EPU) 지수는 428.82로 1990년 통계를 작성한 이후 두 번째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미·중 무역분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해 8월(538.18)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스콧 베이커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 등이 개발한 이 지수는 기준치인 100보다 높으면 불확실성 확대, 낮으면 축소를 뜻한다. 슈퍼세이버가 늘면서 디플레이션(경기 침체속 물가 하락) 등의 양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한국은행이 증가 성장률·물가를 끌어내릴 수 있는 슈퍼세이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은 가운데 미국 중앙은행(Fed)도 비슷한 이유로 '파이어(FIRE)족'을 경계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파이어족은 ‘경제적 자립과 조기은퇴'(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를 목표로 하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다. 40대에 은퇴하기 위해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저축·투자를 늘리는 '2030세대'를 말한다.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는 파이어족과 슈퍼세이버 등이 각국 중앙은행의 골칫거리로 급부상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 용어풀이
슈퍼세이버(super saver)
위험회피 성향이 커지면서 투자·소비를 줄이고 현금을 쌓는 가계·기업을 말한다. 이들의 행태로 투자·소비가 감소되면서 잠재성장률 훼손과 물가 하락 등을 부추길 수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최근 장기침체의 상징으로 의미부여를 새롭게 하면서 주목받고 있는 용어다. 이 총재는 지난달 물가설명회에서 "극단적 위험회피 성향을 갖는 이른바 '슈퍼세이버'가 증가한다"며 “소비·투자의 회복이 더뎌지고 물가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
금고·장롱속 5만원권 '116兆'
2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5월말 예금은행의 총예금 잔액은 작년 말에 비해 5.8% 늘어난 1603조4597억원에 달했다. 사상 처음 1600조원을 돌파했다. 전년 동월 대비 증가율은 12.1%로 2011년 3월(12.3%) 후 가장 높았다. 가계·기업의 예금을 비롯한 현금성자산의 증가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의미다. 통장 잔액 대비 인출금 비율을 나타내는 은행 요구불예금 회전율도 올해 5월에 15.6회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가계·기업의 현금 보유 성향이 강해지면서 돈이 생산·투자 활동에 쓰이지 못하고 통장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5만원권 등 지폐 선호도도 올라갔다. 지난 6월 말 5만원권 화폐발행잔액은 114조7695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화폐발행잔액은 한은이 시중에 공급한 화폐에서 한은 금고로 돌아온 돈을 뺀 수치로 시중에 남아있는 돈을 말한다.시중에 가계와 기업이 장롱과 금고에 쌓아 놓은 5만원권 지폐가 불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한은의 5만원권 발행액 대비 환수액 비율을 나타내는 환수율도 올 1~6월에 26.9%로 지난해(60.1%)의 절반을 밑돈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시중에 공급한 유동성만 120조원을 웃돌고 기준금리도 사상 최저로 내려갔지만 소비·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단기예금 등으로 금융권에서 머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불거진 집값 과열 사태도 슈퍼세이버 등장에서 비롯했다는 분석도 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가계·기업이 불확실성에 대비한 예비적 동기를 바탕으로 현금을 쌓는 것"이라며 "현금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안전자산 수요도 커지며 현금처럼 안전하다고 인식되는 부동산에 현금이 몰린 것"이라고 말했다. 현금을 쌓는 슈퍼세이버가 늘면서 성장률과 물가가 내려가는 등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당국에서도 나오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달 25일 열린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극단적 위험회피 성향을 갖는 이른바 ‘슈퍼세이버(super saver)’가 증가하고 있다”며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소비와 투자의 회복이 더뎌지면서 물가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코로나19·정책불확실에 슈퍼세이버 속출
코로나19로 대내외 불확실성이 부각되면서 가계와 기업들의 투자 심리가 얼어붙은 탓이다. 올 들어 물가상승률이 0%대 초반을 지속하는 등 디플레이션 징후가 나타나는 것도 투자·소비 심리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물가가 내려갈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면서 소비와 투자를 미루고 상대적으로 가치가 부각된 현금을 보유하려는 유인이 커졌다.일각에서는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이 가계와 소비 심리를 위축시켰다고 설명했다. 2018~2019년 최저임금이 2년 새 30% 가까이 올랐다가 2020~2021년에는 연평균 1~2%씩 올리는 것 등이 그렇다. 기업 규제를 풀겠다고 '규제 샌드박스' 정책을 내놓으면서 공정거래법·상법 등 규제를 강화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기업 정책 기조도 기업 투자를 옥죄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5월 한국의 경제정책 불확실성(EPU) 지수는 428.82로 1990년 통계를 작성한 이후 두 번째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미·중 무역분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해 8월(538.18)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스콧 베이커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 등이 개발한 이 지수는 기준치인 100보다 높으면 불확실성 확대, 낮으면 축소를 뜻한다. 슈퍼세이버가 늘면서 디플레이션(경기 침체속 물가 하락) 등의 양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한국은행이 증가 성장률·물가를 끌어내릴 수 있는 슈퍼세이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은 가운데 미국 중앙은행(Fed)도 비슷한 이유로 '파이어(FIRE)족'을 경계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파이어족은 ‘경제적 자립과 조기은퇴'(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를 목표로 하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다. 40대에 은퇴하기 위해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저축·투자를 늘리는 '2030세대'를 말한다.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는 파이어족과 슈퍼세이버 등이 각국 중앙은행의 골칫거리로 급부상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 용어풀이
슈퍼세이버(super saver)
위험회피 성향이 커지면서 투자·소비를 줄이고 현금을 쌓는 가계·기업을 말한다. 이들의 행태로 투자·소비가 감소되면서 잠재성장률 훼손과 물가 하락 등을 부추길 수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최근 장기침체의 상징으로 의미부여를 새롭게 하면서 주목받고 있는 용어다. 이 총재는 지난달 물가설명회에서 "극단적 위험회피 성향을 갖는 이른바 '슈퍼세이버'가 증가한다"며 “소비·투자의 회복이 더뎌지고 물가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