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코로나에 갇힌 판타지 문학 산실 영국 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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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의 생활 움직이는 동력 펍산업영국의 펍 문화는 일상생활을 움직이는 동력이자 경제의 주체다. 펍은 맥주 한잔하면서 모르는 이들과 친교를 나누는 영국 고유의 사교 장소다. 술을 안 마셔도 영국 문화를 배우려면 가봐야 할 장소이기도 하다. 펍에선 라거, 에일, 증류주, 칵테일 등을 마시며 음악과 퀴즈, 다양한 스포츠 중계를 즐길 수 있다. 음식을 바(bar)에서 주문하면 테이블로 가져다준다. 펍 문화는 로마제국과 앵글로색슨의 긴 전통에서 이어져 온 역사이기도 하다.
언제나 코로나 딛고 옛 명성 되찾을까
김종민 < 英 케임브리지대 전기공학과 교수 >
런던 근교의 ‘올드 파이팅 콕스(Ye Olde Fighting Cocks)’는 8세기께 시작된 영국 펍의 원조라고 주장한다. 옥스퍼드의 ‘터프 태번(Turf Tavern)’은 1381년에 세워졌는데, 옥스퍼드 대학생들이 드나드는 ‘술 마시고 교육받는(Education in intoxication) 장소’란 별칭을 가진 곳이다. 리처드 버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부부가 신혼 초에 연극 공연 후 자주 들렀고 스티븐 호킹, 마거릿 대처 등이 토론을 즐긴 곳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학생 시절 맥주를 즐기고, 살짝 마약도 했다는 자리가 보존돼 있다. 1566년 세워진 세인트가일 대로의 ‘램 앤드 플래그(Lamb and Flag)’는 1684년 시작된 이글앤드차일드와 더불어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 루이스와 《반지의 제왕》을 쓴 JR. R 톨킨이 주도한 문학·철학 모임인 잉클링이 탄생한 자리기도 하다. 이들 펍에서 1960년대까지 고유한 판타지 문학이 잉태됐고, 최근 이들 문학이 영상예술로 재탄생해 영국 문화의 세계화와 지역 사회 및 경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케임브리지에서 1667년 시작된 더 ‘이글(The Eagle)’이 단연 두드러진다. 캐번디시 랩의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이 1953년 역사적인 DNA 발견을 이곳에서 세계 최초로 알렸다. 이 펍은 ‘이글의 DNA’로 불리는 맥주로 아직도 이를 기념하고 있다. 케임브리지 강가에 있는 ‘앵커’는 1864년에 세워진 펍이다. 유명한 록그룹 핑크플로이드가 데뷔 전 이곳에서 연주했다고 한다. 케임브리지의 고색창연한 칼리지 풍경을 즐기는 뱃놀이인 펀팅의 출발지로도 유명하다.
2003년에는 약 45만7000명이 영국 펍 산업에 종사했는데 줄어드는 주류 소비와 인건비, 재료비 등의 증가로 2019년에는 42만2000여 명으로 줄었다. 영국 통계청 추산으로는 2019년 3월 현재 3만9135개의 펍이 있는데, 영국 맥주·펍협회는 2018년 말 현재 약 4만7600개의 펍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국의 펍 산업은 2014년과 2019년 사이 연평균 1.4% 성장률을 보였으며, 2019년 시장 규모는 약 32조원이다.
영국의 펍 산업계는 위더스푼, 미첼&버틀러, 그린킹 등의 메이저 회사가 이끌고 있다. 제일 규모가 큰 위더스푼의 2019년 매출은 약 2조8000억원이고 고용인력은 4만3000명에 달한다. 그러나 지난 3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사회격리 여파로 5000만 파인트(약 2900만L) 이상의 맥주 소비가 줄어든 것으로 추정되며, 종사자 42만여 명의 운명도 오리무중인 상태다. 영국 고유문화가 잉태되고 자라난 펍의 미래가 코로나19로 황폐화돼 영국에서 사는 재미를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