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논설실] '임대차 통제'가 만든 뉴욕 브롱스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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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계단이 위치한 곳은 미국 뉴욕의 빈민가로 악명이 높은 브롱스(Bronx)의 167가에 있습니다. 영화에 나오듯 침울하고 매우 위험한 그런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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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빈 공간을 채운 건 뒤늦게 이민을 온 푸에르토리코 등 중남미 출신의 히스패닉 이민자와 흑인이었습니다. 이들이 몰려오면서 백인들의 탈출은 더욱 가속화되었죠.
1960년대 후반, 미국 경제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수많은 재정을 베트남전쟁에 퍼부으면서 국내에선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금리가 오르자 월세도 따라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뉴요커들의 불만이 커졌고 1969년 '임대료 안정법'(Rent Stabilization Law of 1969)이 제정됩니다.그 전에도 뉴욕에선 임대료 통제는 있었지만 규제 대상 주택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법은 6채 이상으로 이뤄진 아파트는 모두 렌트를 통제하기로 했죠. 해당 주택은 약 40만 채에 달했습니다. 위원회를 만들어 임대를 갱신할 때 임대료 수준과 인상률을 제한하는게 핵심이었습니다.
뉴욕시는 1970년 후속 입법으로 '최대 기본임대료'(Maximum Base Rent)라는 제도를 도입합니다. 각 주택의 건축 및 관리비용 등을 감안해 최대 임대료를 수학적으로 산정하는 겁니다. 임대료의 인상폭은 연 7.5%(당시 금리를 감안하면 싼 것입니다)로 제한됐고 집주인이 최대 기본임대료를 받으려면 일정 수준의 임대료를 주택 관리에 재투자해야했습니다.
이 법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1972년 뉴욕시엔 1536채의 새 아파트들만 들어섭니다. 전후 가장 적은 수였지요. 사람들이 더 이상 임대주택에 투자를 하지 않았으니까요.이에 뉴욕 주가 개입해 다시 통제 대상 주택을 대폭 감축했습니다. 하지만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터지고 물가와 임대료가 앙등하자 뉴욕시민들의 불만은 커졌습니다. 1974년 더욱 강화된 임대료 통제법 'ETPA'(Emergency Tenant Protection Act of 1974)이 시행됩니다. 통제 대상 주택을 대대적으로 확대한 겁니다.
이 법으로 인해 가장 타격을 받은 곳이 브롱스입니다. 고가 주택이 많은 맨해튼의 경우 임대료 통제 대상이 적었지만 브롱스는 거의 모든 주택이 통제 대상이었기 때문이죠.
임대료 통제로 수입이 대폭 감소하자 주택 관리를 포기하거나 집을 폐쇄하는 집주인들이 속출합니다. 또 건물가치가 폭락하자 은행들은 대출을 거절하거나 회수했습니다. 이에 매매가 불가능해지자 집주인이 아예 보험금을 노리고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경우까지 빈번해졌습니다. 세입자들도 집이 불타면 다른 공공임대주택 입주자격 우선순위가 주어지자 방화에 나섰습니다.여기에 뉴욕시의 재정난으로 인한 소방예산 삭감까지 겹치며 1970년대 브롱스에서는 무려 30만 채 이상의 주택이 불타 사라졌습니다. 심한 해에는 하루 평균 40차례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70~1980년 사이 사우스 브롱스에 있는 건물의 40%가 불타거나 버려졌고, 인구센서스 조사 단위로 따져봤을 때 브롱스에서 97%의 건물이 파괴된 곳이 7곳, 50% 이상 파괴된 곳이 44곳에 달했습니다.
1977년 상황이 심각해지자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이 브롱스를 방문했고, 1980년 브롱스를 찾은 로널드 레이건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는 "런던 대공습(1940년) 이후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김현석 논설위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