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화전가', 아름다운 리듬의 언어 향연 속 묵직하게 흐르는 시대의 상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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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창립 70주년 기념 연극 '화전가'언어의 리듬이 아름다움의 절정을 만들어낸다. 이 아름다움은 시대의 깊은 상흔과 불안을 품고 흐르기에 더욱 애절하면서도 찬란하게 다가온다. 연극 ‘화전가’는 ‘국립극단 70주년 기념 공연’이란 타이틀에 걸맞은, 곱고 섬세한 감각과 한국 근현대사의 묵직한 무게를 담은 수작이다.
지난 6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국내 연극계를 대표하는 창작진과 배우들의 만남으로 많은 화제가 됐다.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2015) ‘1945’(2017) 등을 통해 근현대사의 궤적을 그려온 배삼식 작가가 대본을 쓰고, 이성열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예수정, 전국향, 김정은 등 베테랑 배우들이 무대에 오른다. 연극 애호가 사이에서 올해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힌 이 작품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에도 매진 행렬을 벌였다.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4월 경북 안동이 배경이다. 한 집안의 여인 9명이 오랜만에 하나둘씩 모여 수다를 떨고 화전놀이(꽃놀이)를 간다. 극은 수많은 재잘거림으로 이어진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옛날 이야기도 나눈다. 셋째 딸 봉아(이다혜 분)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 고모(전국향 분)가 마음에 품었던 남자 이야기 등 가슴 설레는 이야기를 하며 깔깔 웃기도 한다. 여인들의 경쾌한 수다는 안동 사투리의 리듬을 타고 춤을 추듯 쏟아진다. 이 지역의 말이 익숙지 않은 관객이라면 처음엔 그 리듬을 따라가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맥락을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오히려 높낮이가 뚜렷하면서도 보드라운 말투 덕분에 대사는 하나의 음악처럼 다가온다.
무대를 가득 채우는 대사의 힘. 이 채움을 완성하는 것은 ‘공백’이다. 집안 남성들은 대부분 독립운동 등 시대의 무게로 세상을 떠났거나 감옥에 갇혀 있다. 여인들의 수다엔 그 공백으로 인한 상처가 배어 있다. 이를 통해 커다란 공백을 채우며, 삶의 고통을 온몸으로 떠받치고 있는 단단한 여인들의 모습이 부각된다. 개인의 일상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조망하는 배 작가만의 시선과 작법이 잘 드러난다.
무대 구성은 단순하고 정갈하다. 안동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지면서도, 시대의 잔혹한 풍파를 맞은 한 집안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개울물과 비를 통해 물의 이미지도 적극 활용한다.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거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들리는 개울물 첨벙대는 소리와 빗소리가 무게감을 더한다. 오감을 자극하는 음식, 의상 등은 극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초콜릿, 커피, 새하얀 설탕은 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화전놀이를 앞두고 곱게 차려입은 한복은 각 인물들과 무대를 더욱 화사하고 빛나게 한다. 공연은 오는 23일까지.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