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반복 속 변화·파격…'벽돌 작가'의 50년 화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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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곡미술관 '김강용: 극사실적 벽돌' 展 13일 개막캔버스에 벽돌이 가득하다. 벽돌이 삐뚤빼뚤 놓인 작품도 있고 가지런하게 배열된 작품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입체감이 두드러져 진짜 벽돌을 붙여놨나 싶을 정도다. 허락만 해준다면 만져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바짝 다가가서 보니 평면이다. ‘벽돌 작가’로 유명한 김강용 화백(70)의 ‘벽돌 회화’다.
1970년대 중반부터 50년 가까이
'벽돌 회화' 그려온 작가 회고전
극사실적으로 표현한 초기작부터
채색상감기법 사용한 최신작까지
회화·설치·영상 190여 점 전시
"개개인의 소중함과 존엄함 은유"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에서 13일부터 김 화백의 대규모 회고전 ‘김강용 : 극사실적 벽돌’이 열린다. 1970년대 중반 초기작부터 최신작까지 50년 가까운 김 화백의 화업을 아우르는 회화, 설치, 영상 등 190여 점을 선보인다.전북 정읍 태생으로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김 화백은 대상을 사실적이고 치밀하게 묘사하는 극사실주의를 지향했다. 1978년 권수안 김용진 서정찬 송윤희 조덕호 주태석 지석철 등 홍익대 동기들과 함께 극사실 경향의 소그룹 ‘사실과 현실’을 결성해 활동했다. 특히 1970년대 중반 모래를 회화의 재료로 도입하면서 새로운 작품세계를 열었다. 1975년부터 ‘현실+장’ 연작을 통해 사회적 현실과 장소적 성격을 강조한 그는 이듬해 첫 모래와 벽돌 작업을 선보이며 억압적인 당대의 현실에 주목했다.전시장에서 만난 김 화백은 “극사실 회화로 잔디밭을 그리면 잔디 하나하나를 그려야 하는 것처럼 모래알 하나하나가 모여 벽돌이 되고 벽돌이 쌓여 건물이 된다”며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소중함, 존엄함을 은유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작업은 체에 거른 고운 모래를 접착제와 섞어 캔버스에 얇게 펴서 바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다음엔 눈속임 기법으로 벽돌과 그림자를 그려 마치 실제 벽돌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모래와 흙을 그림 재료로 사용하는 것을 넘어 평면과 입체의 교묘한 착시를 유도하는 것이다.1976년 첫 모래 작품 ‘현실+장 76-15’를 선보인 지 40여 년. 1999년까지 흙과 모래를 재료로 동양화의 발묵법을 적용했던 그의 벽돌 작업은 2000년대 들어 단색화를 연상케 하는 모노톤 작업을 거쳐 컬러 작업, 멀티컬러 작업으로 변주되며 다양한 조형적 변화를 모색했다.2000년대 들어 제작한 ‘현실+상’ 연작에서는 실제 벽돌을 모사하는 데서 벗어나 머릿속에서 이상화된 벽돌의 이미지를 실제처럼 표현했다. 이제 벽돌은 모사의 대상이 아니라 화면의 구성요소가 됐다.
모노톤 벽돌 회화의 특징은 하나의 작품 안에서 구상과 추상이 혼재하고 대립하며 여러 요소가 조화를 이룬다는 것. 모래의 본래 색상과 어두운 톤으로 만들어낸 그림자만으로 이뤄진 거대한 모노톤 회화는 벽돌보다 전체 화면에 시선을 집중시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김 화백이 모노톤 벽돌 작업에 컬러를 도입한 것은 2004년부터 10년가량 미국 뉴욕에서 작업할 때였다. 뉴욕 빌딩들이 다양한 색의 벽돌로 지어진 걸 보고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작업은 단색조에서 ‘멀티 컬러’로 확장됐고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기 위해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캔버스에 모래를 바른 다음 다른 색상의 벽돌이 들어갈 공간을 정확하게 파내어 새로운 모래를 채워넣는다. 최소한의 물감을 이용해 빛과 그림자만 그려넣으면 된다.
기존에 쓰던 강 모래 외에 천연석과 대리석을 갈아 만든 색색의 규사를 재료로 추가하면서 근래의 멀티컬러 작업에서는 화사하고 리드미컬한 입체감이 돋보인다. 김 화백은 “최근에는 색을 절제하고 신비감으로 또 다른 시각적 경험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작업하고 있다”고 말했다.사용하는 색채가 많아지면서 화면 구성도 다양해졌다. 색면추상의 화면 구성을 연상케 하는 화면분할이 대표적이다. 최신작들에서는 벽돌 이미지가 화면을 빽빽하게 채우지 않고 여백을 많이 두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김 화백은 “특징적 요소를 절제해 표현하면 입체효과가 더욱 두드러진다”며 “점과 선 몇 개로 작업하는 셈”이라고 했다.이수균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은 “김강용의 극사실 작업은 무한 반복과 단순함 속에 수많은 변화를 내포하고, 창조적 파격을 숨긴 듯 드러낸다”며 “진실과 허구의 구별이 모호하고 원본의 의미가 무색한 오늘날 차갑고 냉정하지만 딱딱한 진실 같은 그의 벽돌 회화가 그리워지는 이유”라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9월 20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