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IBM 차세대 CPU 생산…이재용의 '반도체 비전' 결실

7나노 공정 적용…내년 출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이 2016년 미국 아이다호주 선밸리에서 열린 ‘앨런앤드컴퍼니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지니 로메티 IBM 이사회 의장(당시 IBM 최고경영자)과 나란히 걷고 있다. 한경DB
삼성전자가 IBM의 기업용 클라우드 서버에 들어가는 차세대 중앙처리장치(CPU)를 수탁 생산한다. 이번 수주를 계기로 삼성전자가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1위 업체인 대만의 TSMC와 대등한 경쟁을 펼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IBM은 17일 자사 온라인 뉴스룸을 통해 차세대 서버용 CPU인 ‘IBM 파워10 프로세서’를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장에서 생산한다고 발표했다. IBM이 처음으로 출시하는 7나노미터(㎚·1㎚=10억분의 1m) 공정 CPU다. 삼성전자는 2021년 하반기부터 극자외선(EUV) 공정으로 생산할 계획이다. IBM은 “삼성전자의 세계적인 기술력과 IBM의 프로세서 디자인이 만난 제품”이라고 소개했다.

삼성은 이번 수주로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해 4월 선포한 ‘반도체 비전 2030’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은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 133조원을 투자, 세계 1위에 오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업계 최초로 EUV 공정을 적용한 7나노 제품을 출하한 데 이어 올해 2분기 5나노 공정 양산에 들어가는 등 초격차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의 TSMC 추격에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세계에서 7나노 이하 미세공정이 가능한 파운드리업체는 삼성전자와 TSMC밖에 없다. TSMC에 비해 다소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고객사 서비스도 개선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 '파운드리 진격'…TSMC가 못하는 기술로 '거물 IBM' 확보

지난해 4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을 때 시장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종합반도체회사(IDM)인 삼성전자를 경쟁사로 의식한 글로벌 팹리스 기업들이 핵심기술 유출을 꺼려 파운드리(수탁생산) 물량을 주지 않을 것이란 이유였다.

IBM이 차세대 전략제품인 서버용 중앙정보처리장치(CPU) ‘IBM 파워10 프로세서’를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장에서 생산한다고 17일(현지시간) 발표하면서 이 같은 우려는 사그라들었다. IBM 측은 이날 “7나노미터(㎚·1㎚=10억분의 1m) 미세공정을 포함해 삼성전자와 10년 이상 기술개발을 협력해왔다”며 “성능과 효율성을 크게 개선한 신제품을 내놓게 됐다”고 밝혔다.

D램서 쌓은 노하우, 파운드리에서 결실

IBM이 이날 공개한 파워10 프로세서는 전작인 ‘파워9 프로세서’에 비해 에너지 효율, 작업 처리용량, 밀도 등에서 3배 이상 향상된 성능을 갖췄다. 차세대 반도체는 작업 처리 속도와 에너지 처리효율을 높여 사용전력을 줄이는 기술이 핵심으로 꼽힌다. 반도체 회로선폭이 미세할수록 연산처리능력이 높아져 성능이 개선된다.

삼성전자는 D램 등 메모리 반도체에서 쌓은 초소형·저전력 반도체 노하우를 활용해 파운드리에서도 기술 차별화에 성공했다. 7나노 이하 초미세공정이 가능한 업체는 세계에서 TSMC와 삼성전자 두 곳뿐이다. 극자외선(EUV) 노광을 활용한 7나노 공정은 2018년 개발해 TSMC보다 빨랐다. IBM이 차세대 CPU 생산을 삼성전자와 협력한다고 발표한 것도 그 해다.

최근에는 반도체 ‘초격차 전략’의 핵심으로 꼽히는 수직적층 기술을 시스템 반도체에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삼성전자는 이달 7나노 EUV 시스템반도체에 3차원 적층 패키지 기술인 ‘X-큐브’를 적용한 테스트칩을 생산했다. 삼성전자가 퀄컴, 엔비디아, 바이두에 이어 IBM까지 고객사로 확보하게 된 데는 이 같은 기술력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IBM 사로잡은 일등공신 이재용 부회장

이번 IBM의 차세대 서버용 CPU 공급에는 이 부회장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파운드리 후발주자인 삼성전자는 업계 1위 TSMC에 비해 세계 팹리스 업체들과의 네트워크가 아쉽다는 평가가 많았다. 총수인 이 부회장의 인맥을 통해 이를 극복했다는 평가다. 이 부회장은 2016년 로메티 당시 IBM 최고경영자(CEO)를 미국 아이다호주에서 열린 ‘앨런앤코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산책을 하면서 5세대(5G), 인공지능(AI) , 클라우드 등 기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알려지면서 삼성전자와 IBM이 신사업에 협력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2년 전인 2014년 이 부회장이 같은 행사에서 팀 쿡 애플 CEO와 만난 뒤 두 회사 간 소송을 대거 취하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부회장은 올해 들어 매달 반도체 사업장을 찾거나 회의를 열 정도로 ‘반도체 현장경영’에 힘쓰고 있다. 지난 2월에는 경기 화성사업장을 찾아 EUV전용 반도체 생산라인을 살펴봤다. IBM 파워10 프로세서도 이곳에서 양산한다. 지난 5월에는 경기 평택 EUV 파운드리 라인에 1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가까워진 ‘시스템 1위’ 꿈

이번 IBM과의 계약을 시작으로 반도체 업계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인텔이 7나노 양산에 잇따라 실패하는 상황에서 삼성전자의 미세공정 기술력이 입증되면서 TSMC와 삼성전자 진영으로 시장이 재편될 것이란 관측이다. 로이터는 이날 IBM의 발표를 전하면서 “인텔이 고전하고 있는 가운데 경쟁 업체들의 영향력이 커질 전망”이라고 분석했다.2030년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는 이 부회장의 ‘꿈’이 실현 가능해졌다는 전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올 1분기 15.9%였던 파운드리 점유율을 2분기 18.8%로 높이면서 TSMC를 추격하고 있다. 같은 기간 TSMC와의 격차도 38.2%에서 32.7%로 줄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모바일과 HPC(고성능컴퓨팅), AI 등 다양한 분야로 미세공정 기술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면서 시장 지배력을 키워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수빈 기자 ls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