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대한민국은 약소국이 아니다

대북 지원 '허용'하지 않겠다는
김정은의 황당한 어법

'사드보복' 5년째 우려먹는
중국의 '한국 길들이기' 행패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나

이학영 상임논설고문
“(홍수 피해와 관련해) 그 어떤 외부 지원도 허용하지 말라”고 했다는 북한 통치자 김정은의 말은 인도 여행자가 겪었다는 일화를 떠올리게 했다. 도심을 걷다가 만난 걸인에게 몇 푼을 쥐여주며 눈인사를 했다. 걸인은 받은 돈만 챙길 뿐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 태도가 하도 당당해 이유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내가 기회를 줬으니 당신이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세(來世) 윤회를 믿으며 ‘복을 받는 행위’로서 적선(積善)을 중시하는 인도 사회에서 흔한 풍경이란다.

김정은이 힌두교나 불교 신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지원’을 ‘허용’ 대상으로 규정한 말본새가 어이없다. 북한에 최근 발생한 홍수 피해를 돕겠다는 방침을 공개한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불허’는 명백하게 한국 정부를 겨냥한 발언이다. 통일부는 김정은 발언이 나오기 나흘 전 “북한 수해 지원을 다각적으로 검토해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김정은의 발언은 한국에 대한 북한 정권의 인식과 자세가 얼마나 방자해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갑을’ 단계를 넘어 ‘주종(主從)’ 관계로 한국을 다루려는 행태를 드러낸 지 꽤 됐다. 남북한 합의하에 한국 측이 건설한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공개 폭파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에게 조롱과 모욕을 넘어 협박까지 서슴지 않는 발언을 대놓고 쏟아내는 일에 거리낌이 없다. 홍수 발생으로 북쪽 댐을 방류해야 할 경우 남쪽이 대비할 수 있게 사전 통지하기로 한 정부 간 합의도 무시했다. 이번 홍수 때 경기 북부지역이 큰 피해를 본 데는 북한이 황강댐을 아무 통지 없이 기습 방류한 탓이 컸다.

어느 것 하나도 그냥 넘겨서는 안 될 일인데 정부 대응은 그렇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황강댐 방류를 “미리 알려주지 않아 아쉽다”고 에둘렀고, 통일부 당국자는 “불행한 일”이라고 남 얘기하듯 했다. 상대방에게 큰 피해가 일어날 게 명백하다면 미리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의 상식이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까지 한 걸 북한이 지키지 않았고, 일언반구 사후 해명조차 없는데 않느니만 못한 말만 늘어놨다. 북한 정권에 만만함을 넘어 노리갯감으로 전락하는 일을 누가 자초하고 있는지 정신 차리고 돌아볼 때가 지났다.

그런 점에서 남북문제 못지않게 걱정스러운 게 한·중 관계다. 한국을 북한 핵 공격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설치한 사드(높은 고도의 미사일방어체계)를 놓고 중국 정부에 코 꿰인 상태를 못 벗어나고 있다. 중국은 한국에 설치된 레이더가 자국 미사일을 무력화한다는 억지 주장과 함께 온갖 보복 조치를 쏟아냈다. 중국 정부의 서슬이 하도 시퍼렇자 문 대통령이 중국에 달려가 “추가 설치를 않을 것이며 미국·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지 않겠다”는 등의 ‘3불’에 합의해 굴욕적인 주권 포기 논란을 일으켰다. 그런데도 중국은 아직껏 ‘사드 보복 목줄’을 온전히 풀지 않고 있다.중국 공산당의 외교 분야 최고위인사인 양제츠 정치국원이 이번주 한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은 그래서 개운치 않다.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전방위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맨손으로 한국에 올 리 없다. 한국 정부를 어르고 달래 중국 편으로 묶어두기 위한 목록이 가득하다는 말이 들린다. 그 대가로 거론되는 건 시진핑의 한국 방문과 ‘사드 보복 완전 철폐’ 정도다.

미·중 대립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시진핑 방한을 서두를 일인지도 의아하지만, 아직껏 ‘사드 보복 해제’가 중국의 카드로 남아 있다는 게 황당하다. 자기 나라 안보를 위한 조치를 당당하게 설명하지 못한 채 이렇게까지 끌려다니는 속내를 도무지 알 수 없다. 한국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이래서는 안 된다.

한국은 서방 최강 국가 모임인 G7(주요 7개국) 추가 멤버로 거론될 만큼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 나라다. 중국이건 북한이건 상식을 무시한 집단에 ‘친선’을 구걸할 약체 국가가 아니다. 냉전시대 ‘깡패국가’ 소련에 목덜미를 잡혀 지낸 인근 국가 핀란드와 같을 이유가 없다. 나라의 존엄과 안보, 국익을 품격있게 지켜내는 정부를 보고 싶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