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지나온 길과 가야할 길

황서종 < 인사혁신처장 mpmhongbo@korea.kr >
어느새 공직생활 32년째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던 1980년대 후반, 각 부서에는 타자 업무만을 전담하는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손글씨로 투박하게 쓴 보고서를 정돈된 인쇄본으로 만들기 위해 타자 전담 직원 곁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 직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돌아가면서 점심을 사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업무용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활용해 업무를 처리하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프린터로 보고서를 손쉽게 인쇄하는 지금의 업무 환경은 3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최근에는 클라우드 저장소 이용까지 활성화돼 공간을 뛰어넘는 업무 처리도 가능해지고 있다. 불과 수십 년 사이 일어난 공직사회 업무 환경의 변화는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 수준(桑田碧海)’이다.공직사회 구성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1988년 여성 공무원 비율은 27.3%에 불과했다. 지금은 여성 공무원 비율이 전체의 절반을 넘고(50.8%) 매년 증가 추세에 있다. 민간경력자 일괄채용시험, 개방형 직위 공모제도 등을 통해 민간에서 근무하던 유능한 인재들의 공직 유입도 확대되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가 본격적으로 공직사회 구성원으로 자리 잡으면서 조직문화도 달라지고 있다. 정부의 일하는 방식, 인적 구성, 문화가 날이 갈수록 바뀌고 있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진리도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의 소명과 책임이다. 국가 최고 규범인 헌법에서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진다’라고 천명하고 있듯이 공무원의 존재 이유는 오롯이 국민을 위함에 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어느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공무원이라면 국민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제는 변해야 하는 것도 있다. 지난 32년 공직생활 동안 공직사회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좋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서 공무원의 청렴성을 묻는 질문에 공무원은 68%가 높다고 응답했지만 국민은 17%만이 높다고 대답했다. 공무원의 전문성이 높다는 응답의 경우에도 공무원(39.6%)과 국민(24.9%) 사이의 인식 차이가 드러났다. 공무원이 높아진 국민 기대와 요구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시대정신을 읽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제는 공직사회가 근본적으로 쇄신해 바뀌지 않았던 국민 인식을 변화시킬 때가 됐다.

과거 100년에 걸쳐 일어났던 변화가 10년 만에 이뤄지고 있는 시대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염병 위기도 헤쳐나가야 한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고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공무원 개개인이 끊임없이 학습하고 스스로를 단련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국민 기대에 부응한다는 공무원의 책임과 소명의식의 출발점이다. 공직사회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공무원이 국민에게 변함없는 지지와 응원을 받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