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에 퇴임하는 아베 누구?…"韓 위안부 일상" 망언 주인공
입력
수정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8일 사임키로 함에 따라 한일 양국관계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 주목된다. 그는 작년 11월 제1차 집권기를 포함해 일본 최장수 총리가 됐고, 지난 24일에는 연속 재임기간 기준(2799일)으로도 역대 최장수 일본 총리를 기록하게 됐다.
아베 총리는 재임기간 동안 일본을 ‘잃어버린 20년(장기 경기부진)’에서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보수 일변도의 정책과 영토 갈등 등으로 한국, 중국 등 주변국과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기도 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정치명문가 출신으로 1954년 야마구치현 나가토에서 출생했다. 백부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와 외조부이자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각각 총리를 지냈으며 부친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는 외무상을 역임했다.
정계에 입문한 아베는 2000년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 관방 부(副)장관을 맡았고 2003년 9월 자민당 간사장, 2005년 10월 관방장관을 맡는 등 승승장구했다. 2006년엔 52세로 전후 최연소 일본 총리에 올랐다. 하지만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으로 인해 366일만에 총리직을 사임한 전력이 있다. 2012년 국회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 정권을 탈환하고 5년 만에 총리직에 복귀했다.
아베는 정치권을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국수주의적 역사관과 우익성향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특히 과거사와 관련된 망언을 일삼았다. 1997년 한 강연에서 “한국에는 기생집이 많아 성매매가 일상적이고 위안부 활동도 이런 생활 속에 녹아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는 발언으로 공분을 샀다.
총리 취임 직후 한국, 중국 등과 잇따라 정상회담을 갖고, 과거사를 반성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밝히는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특히 2012년 재취임한 이후에는 헌법해석을 바꿔 집단적 자위권(동맹국이 침략받을 경우 무력 개입할 수 있는 권리)의 행사를 한정적으로 허용하는 등 우경화의 길을 계속 걸었다. 전쟁 가능한 국가로의 헌법 개정을 추진하다가 무산되기도 했다. 또 독도와 쿠릴 4개 섬, 센카쿠열도 등을 놓고 한국과 러시아, 중국 등 주변국과의 갈등을 빚기도 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경제 재생을 기치로 내걸고 인위적인 엔화 가치 하락, 무제한 통화완화 정책 등으로 대표되는 ‘아베노믹스(대규모 경기부양 정책)’를 추진했다. 취임 당시 1만395였던 닛케이225지수가 2만2283으로 두 배 이상 오르는 등 일본을 ‘잃어버린 20년(장기 경기부진)’에서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적인 성과에 힘입어 50% 이상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해 왔지만 올들어 지지율이 30%대까지 급격히 떨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데다 주변 인사들의 부정·부폐 의혹이 잇따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코로나19 여파로 2분기 경제성장률이 연율 -27.8%로 사상 최악을 기록하는 등 경제 성과도 상당 부분 취임 이전으로 뒷걸음질 쳤다는 평가도 나온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아베 총리는 재임기간 동안 일본을 ‘잃어버린 20년(장기 경기부진)’에서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보수 일변도의 정책과 영토 갈등 등으로 한국, 중국 등 주변국과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기도 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정치명문가 출신으로 1954년 야마구치현 나가토에서 출생했다. 백부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와 외조부이자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각각 총리를 지냈으며 부친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는 외무상을 역임했다.
정계에 입문한 아베는 2000년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 관방 부(副)장관을 맡았고 2003년 9월 자민당 간사장, 2005년 10월 관방장관을 맡는 등 승승장구했다. 2006년엔 52세로 전후 최연소 일본 총리에 올랐다. 하지만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으로 인해 366일만에 총리직을 사임한 전력이 있다. 2012년 국회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 정권을 탈환하고 5년 만에 총리직에 복귀했다.
아베는 정치권을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국수주의적 역사관과 우익성향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특히 과거사와 관련된 망언을 일삼았다. 1997년 한 강연에서 “한국에는 기생집이 많아 성매매가 일상적이고 위안부 활동도 이런 생활 속에 녹아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는 발언으로 공분을 샀다.
총리 취임 직후 한국, 중국 등과 잇따라 정상회담을 갖고, 과거사를 반성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밝히는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특히 2012년 재취임한 이후에는 헌법해석을 바꿔 집단적 자위권(동맹국이 침략받을 경우 무력 개입할 수 있는 권리)의 행사를 한정적으로 허용하는 등 우경화의 길을 계속 걸었다. 전쟁 가능한 국가로의 헌법 개정을 추진하다가 무산되기도 했다. 또 독도와 쿠릴 4개 섬, 센카쿠열도 등을 놓고 한국과 러시아, 중국 등 주변국과의 갈등을 빚기도 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경제 재생을 기치로 내걸고 인위적인 엔화 가치 하락, 무제한 통화완화 정책 등으로 대표되는 ‘아베노믹스(대규모 경기부양 정책)’를 추진했다. 취임 당시 1만395였던 닛케이225지수가 2만2283으로 두 배 이상 오르는 등 일본을 ‘잃어버린 20년(장기 경기부진)’에서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적인 성과에 힘입어 50% 이상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해 왔지만 올들어 지지율이 30%대까지 급격히 떨어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데다 주변 인사들의 부정·부폐 의혹이 잇따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코로나19 여파로 2분기 경제성장률이 연율 -27.8%로 사상 최악을 기록하는 등 경제 성과도 상당 부분 취임 이전으로 뒷걸음질 쳤다는 평가도 나온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