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손민수 "나를 내려놓고 베토벤이 된 듯 연주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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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타 전곡 시리즈' 완주 앞둔 피아니스트 손민수“음악 지식만 쌓아서 연주하면 정해진 길만 걷게 되죠. 저 자신을 내던지고 베토벤이 된 듯 연주할 겁니다.”
3년 전 시작한 '베토벤 대장정'
19일 인천 엘림아트센터 등서
'후기 3부작' 연주회로 마무리
"그동안 쌓아온 지식·해석 잊고
'인간 베토벤'으로 무대 설 것"
3년여의 ‘베토벤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공연을 앞둔 피아니스트 손민수(44)의 각오다. 그는 2017년 시작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시리즈’의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독주회를 오는 19일 인천 엘림아트센터 엘림홀에서 연다. 1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릴 예정이던 공연은 12월 21일로 연기됐다. 11일에는 소니클래식을 통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32번 전곡을 녹음한 앨범도 발매한다. 지난 1일 서울 서초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연습하며 세운 계획대로 연주하진 않겠다”며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첫 음을 치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고 말한 것처럼 음악은 연주하는 순간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손민수는 1994년 한예종 음악원에 수석 입학한 뒤 18세에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에 들어갔다. 1999년 이탈리아 부조니 콩쿠르 3위, 2001년 미국 클리블랜드 콩쿠르 2위를 차지하고, 2006년 캐나다 호넨스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연주 활동을 펼치다가 2015년 한예종 교수로 임용돼 귀국했다.
그는 한예종 학생들을 마주하며 음악가로서 새로운 고민이 싹텄다고 했다. “재능 있는 학생들이 열정 가득한 자세로 예술을 대하는 걸 지켜보며 저 자신을 돌아봤죠. ‘앞으로 뭘 해야 할까’를 고민했어요. 늘 동경했던 베토벤이 떠올랐습니다.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사사한 러셀 셔먼 선생님의 영향도 컸죠.”
셔먼 교수는 깊이 있는 곡 해석과 품위 있는 연주로 ‘건반 위의 철학자’라 불린다. 1996년 60대 후반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앨범을 냈다. 셔먼 교수는 3년 전 전곡 연주를 시작하는 손민수에게 “작품을 해석하기 전에 인간 베토벤을 들여다보라”고 강조했다. “우선 베토벤을 따라야 하고 그를 대변해야 하고 마지막엔 베토벤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피아노 앞에선 제가 아니라 베토벤이 다시 돌아와 있는 수준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조언도 하셨고요.”손민수는 악보부터 파고들었다. 베토벤이 남긴 자필 악보와 연습 악보를 분석했다. 출판사별로 구분한 악보도 들췄다. 19세기 베토벤이 악보를 선보일 때 출판사별로 해석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베토벤이 출판사와 벌인 논쟁을 담은 편지도 찾아봤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자필 악보들, 출판사와의 갈등이 담긴 자료를 보며 베토벤이 어떻게 박자를 다뤘고, 음정을 결합하고 분리했는지를 살폈습니다. 그러자 음정 하나에도 예술혼을 쏟아냈던 베토벤이 보였습니다.”
악보만으론 부족했다고 느꼈다. 손민수는 베토벤이 남긴 유서까지 찾아봤다. 1802년께 청력을 잃기 시작한 베토벤이 동생에게 남긴 편지로 음악학자들에겐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라 불리는 글이다. 독일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요양하며 쓴 글에는 청력 손실로 인한 좌절, 음악가로서의 고통,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료를 살피다보니 인간 베토벤이 보였습니다. 모든 것에 초월한 그의 음악 철학을 발견했습니다.”
베토벤에게 빙의하듯 연주에 매진해온 손민수의 다음 이정표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다. 그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이비어 전곡’ 연주에 도전할 계획이다. 24가지 단조와 장조로 쓰인 전주곡과 푸가 모음곡을 합쳐 48곡에 달하는 대작이다. “피아니스트에게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가 신약성서라면 바흐의 평균율은 구약성서입니다. 화성음악의 시작을 알린 그를 짚어보며 한층 더 성장할 수 있겠죠.”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