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도체 몰아치는 미국…화웨이에 이어 SMIC도 규제 [황정수의 반도체 이슈 짚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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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방부, "화웨이에 이어 중국 SMIC도 제재 리스트에 올리는 방안 검토"미국 정부가 화웨이에 이어 중국을 대표하는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업체 SMIC(Semiconductor Manufacturing International Corporation)까지 규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미국 정부의 중국 반도체기업 압박이 더욱 거세지는 모습이다.
SMIC는 세계 5위 파운드리업체, 화웨이와 거래
최근 중국 정부가 세제혜택 주며 집중 육성
중국의 반도체 굴기 좌시하지 않겠다는 미국 정부의 의중 드러나
대만 미디어텍도 화웨이 수출 막혀 '발등의 불' 떨어져
중국 파운드리 SMIC에 미국 장비 공급 막는 방안 검토
로이터는 4일(현지시간) "미국 국방부 관계자가 중국 최고의 칩 제조업체 SMIC를 무역 블랙리스트에 추가할지 여부를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 대변인은 "국방부가 다른 기관과 협력해 SMIC를 규제할 지 논의 중"이라며 "미국 업체가 SMIC로 제품을 보내기 전에 (미국 정부의)라이선스를 받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미국 국방부는 수출 규제 주무 부처인 상무부에 SMIC를 규제 목록에 올려달라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상무부는 화웨이, ZTE, Hikvision 등 275개 중국 기업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미국 기술과 장비 등의 수출을 사실상 금지하고 있다. SMIC와 워싱턴 주재 중국 대사관은 로이터의 논평 요청에 답하지 않았다.미국 정부는 SMIC 규제를 검토하는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다만 미국 국방부가 직접 나선 것을 볼 때 화웨이처럼 SMIC에 대해서도 '중국 인민해방군을 돕는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파운드리는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업체)의 주문을 받아 반도체를 생산하는 사업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의 3분기 시장점유율 전망치 기준 세계 1위는 대만 TSMC(53.9%)다. 2위는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17.4%)고 3위는 미국 글로벌파운드리(7.0%)다. SMIC는 4.5%의 점유율로 세계 5위다.미국 국방부가 SMIC 규제를 검토 중인 속내는 중국 반도체 사업을 주저앉히기 위해서란 분석이 우세하다. 퀄컴, 엔비디아, 하이실리콘(화웨이 자회사) 같은 팹리스가 아무리 설계를 잘해도 파운드리의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생산이 불가능해진다. 지난 5월 미국 정부가 미국 화웨이의 반도체 칩 생산을 봉쇄하기 위해 하이실리콘의 주문을 받아 반도체를 생산했던 대만 TSMC를 타깃으로 삼은 것도 같은 이유다.
화웨이와 대만 TSMC와의 거래가 막히자 중국 정부는 자국 파운드리인 SMIC를 적극 육성 중이다. 중국 국무원은 창립 이후 15년이 지난 반도체 제조기업이 28nm 이하의 미세 공정을 도입하면 최대 10년간 법인세를 면제해주기로 했다. SMIC의 주력은 14nm 공정이라서 'SMIC 맞춤형 지원'이란 얘기가 나았다. SMIC는 지난 7월 상하이증권거래소 과학혁신판 2차 상장을 통해 약 9조원을 조달했다. 이 자금은 모두 초미세공정 진입에 쓰일 것으로 보인다.
SMIC는 TSMC,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처럼 7nm 이하 초미세공정을 도입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TSMC,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를 거친 대만 출신 양몽송 사장이 진두지휘하고 있다. 지난해엔 5nm 공정부터 필수적인 네덜란드 ASML의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도입을 추진하다가 미국 정부의 견제로 실패하기도 했다. 최근 대만 TSMC 출신 엔지니어를 대거 영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화웨이 역시 SMIC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올 상반기 SMIC는 화웨이의 14nm급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기린 710A’를 주문 받아 양산에 성공했다. 중국 정부가 전폭적으로 SMIC를 지원하고, 화웨이도 SMIC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자 미국 정부가 칼을 뽑은 것이란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미국 정부의 제재가 현실화되면 SMIC의 운명은 어떻게될까. 미국 기술이나 장비 없이는 사실상 파운드리사업이 불가능해진다. 대만 TSMC가 지난 5월 미국 정부에 백기를 들고 화웨이의 주문을 안 받겠다고 선언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만약 SMIC가 무너지게된다면 세계 2위 파운드리 업체 삼성전자와 파운드리사업을 하는 SK하이닉스 자회사 SK하이닉스시스템IC, DB하이텍 등 국내 업체들엔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SK하이닉스시스템IC는 중국 시장 공략을 위해 충북 청주공장에 있는 파운드리설비를 우시로 옮기고 있다. 올 연말부터 본격 양산에 나설 계획이다.
화웨이 제재로 재고 떠안게 된 대만 통신칩 업체 미디어텍
미국 정부의 중국 제재 후폭풍은 SMIC 뿐만 아니라 대만의 팹리스 미디어텍에도 미치고 있다. 미디어텍은 스마트폰의 두뇌역할을 하는 AP가 주력제품이다. '디멘시티' 시리즈가 핵심 모델이다. 퀄컴에 이어 세계 2위 AP 업체지만 '프리미엄' 제품보단 '중저가' 제품에 강점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미디어텍은 "미국 시장에 자사 5G 칩이 탑재된 스마트폰이 출시됐다"고 발표했는데, 이 폰은 LG전자의 '벨벳'이다. 잘 나가던 미디어텍에 위기가 닥친 것은 지난달 미국 정부가 화웨이 2차 제재를 발표하면서부터다. 미국 정부는 "미국 기술이나 장비로 만드는 제품을 화웨이에 공급하려면 상무부의 허가를 받아야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5월엔 '화웨이의 설계대로 반도체를 생산하는 업체', 즉 TSMC만 타깃이었지만 규제 대상이 거의 모든 반도체 업체로 확대된 것이다.지난달 제재는 사실상 미디어텍을 겨냥한 것이다. 화웨이는 TSMC를 통해 자체 통신칩 '기린' 제조가 막히자 미디어텍의 통신칩 '디멘시티'를 받아 스마트폰을 만드려고 했다. 화웨이가 미디어텍에 넣은 주문 물량만 3000만세트란 얘기도 나온다. 이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9월15일부터 화웨이에 수출하려면 허가를 받아야한다"고 발표하자 미디어텍은 '초긴장' 상태다. 외신에 따르면 미디어텍은 미국 상무부에 '화웨이에 수출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망은 비관적이다. 미국 정부가 미디어텍에 허가를 내줄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미디어텍이 화웨이에 통신칩을 공급하지 못하게 되면 적지 않은 손실이 예상된다. 미디어텍이 재고를 중국 샤오미, 오포, 비보 등에 싼값에 넘기는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이 벌써부터 제기된다.
삼성전자 메모리 1위의 비결은
삼성 반도체 신화의 주역으로 불리는 권오현 삼성전자 상임고문(前 삼성 종합기술원 회장)이 2018년 베스트셀러에 오른 '초격차'의 후속편 '초격차: 리더의 질문'을 오는 10일 출간한다. 새 책엔 삼성전자 메모리반도체가 세계 1위에 오른 비결이 짤막하게 담겨있다. 이 내용을 소개한다.책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 삼성을 포함해 미국, 일본, 유럽의 20여개 반도체업체들이 4Mb(메가비트) D램 개발 경쟁 중이었다. D램에 필요한 커패시터(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려면 일정 면적이 필요한데 1Mb D램까진 평면 구조로 가능했지만 4Mb부턴 '입체구조'가 필요했다. 당시 면적을 증가시키는 두 가지 방법이 제시됐다. '트렌치' 방식과 '스택' 방식이다. 스택은 쉽게 말해 대지에 고층건물을 올리는 것, 트렌치는 지하로 파는 것이다. 대부분 업체들은 두 개 방식을 병행했는데 선택의 시간이 왔다. 일본 업체들은 주로 트렌치를 선호했다.
삼성 안에서도 두 기술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선택은 이건희 회장의 몫이었다. 이 회장은 기술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통찰력을 발휘했다. '어떤 방식이 쉽게 분석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고민한 것이다. 고층건물을 쌓는 방식의 스택 방식이 지하로 뚫는 트렌치보다 불량 분석 등이 쉬웠다. 향후 작은 면적에 구조물을 쌓을 때도 위로 쌓는 게 아래로 파는 것 보다 쉬워보였다. 그래서 선택한 게 위로 쌓는 '스택' 방식이다. 몇년 뒤 스택 방식을 채택한 삼성전자는 세계 1위로 올라섰지만 트렌치 방식을 택했던 일본 업체들은 대부분 몰락했다. 권 고문은 이 회장의 선택을 '사업의 발전성'을 고려해 올바른 선택을 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삼성이 일본 소니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 중인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의 'CMOS이미지센서'도 경영자의 선택이 미래를 바꾼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CMOS이미지센서는 스마트폰이나 차량 등에 들어온 빛을 디지털 신호로 바꾸는 반도체로, 카메라의 '눈' 역할을 한다.
권 고문이 센서 사업을 맡았던 1990년대 시장은 일본 업체들의 독무대였다. 일본업체들은 CCD(Charge Coupled Device) 방식의 센서를 주력 제품으로 밀고 있었다. 삼성전자도 자체 개발을 위해 CCD 개발팀을 구성했지만 기술력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권 고문은 'CCD가 향후 모바일 시대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다. 고전압에 소비전력이 컸기 때문에 캠코더 같은 기기엔 활용할 수 있겠지만 휴대폰엔 넣을 수 없어 '시장 성장성'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권 고문은 이후 신기술인 CMOS이미지센서에 집중했고 이를 기초로 현재 세계 2위 자리에 올라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세계 최초 1억800만화소 이미지센서를 개발하고 샤오미, 오포, 비보, 모토로라 등에 공급 중이다. 2019년 3분기 약 40%포인트에 달했던 소니와의 점유율 격차도 최근 20%초반으로 줄였다. 이밖에 삼성전자가 자랑하는 '3차원 구조 낸드플래시'도 시장 성장성을 염두에 둔 결정이 빛을 본 사례로 꼽혔다. 2000년대 초반 개발된 낸드플래시는 스마트폰, PC 등으로 확장되면서 '대용량'에 대한 수요가 커졌다고 한다. 낸드플래시는 2차원 구조라서 '초대용량'을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게 권 고문의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2000년대 후반부터 3차원 구조 V낸드 개발에 주력했다. 권 고문은 "다른 회사들은 실현 불가능한 기술로 여겼지만 2D구조는 발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며 "경쟁사들이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삼성은 고부가가치 낸드플래시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다"고 적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