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SK 날선 싸움…배터리전쟁 '합의' 물건너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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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화학 "특허침해 해놓곤 뻔뻔하게 소송" vs SK이노 "억지주장…꼬투리 잡지 말라"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 2차전지(배터리) 기술 분쟁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소송과 맞소송을 주고받더니 최근에는 ‘상호 비방전’까지 장외에서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양사 간 합의 가능성을 점쳤던 업계는 이제 “어느 한쪽이 치명상을 입어야 끝이 날 것”이란 비관적 전망을 내놓고 있다.
소송 중에 상호 비방 '장외 격돌'
사흘간 양측 입장문 4회 내놔
갈수록 감정의 골 깊어져
사흘간 입장문만 네 번 나와
양사 간 분쟁은 1년5개월이나 된 이슈다. 작년 4월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을 영업비밀 침해 혐의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와 미국 법원에 제소한 것이 시작이었다. LG화학 배터리사업부 직원이 무더기로 SK이노베이션으로 옮겼고, 이때 핵심 기술이 유출됐다는 취지였다. 이 분쟁이 다시 조명받은 것은 지난 4일 나온 LG화학의 입장문이 발단이었다. 내용은 이랬다.“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의 기술을 빼가고 특허를 등록했다. 이것도 모자라 오히려 특허 침해 소송을 LG화학을 상대로 제기했다.”여기서 말하는 소송은 작년 9월 SK이노베이션이 제기한 것이다.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을 영업비밀 침해로 제소하자, SK 측이 맞대응하는 차원에서 제기했다. “미국에서 취득한 배터리 특허(994 특허)를 LG화학이 침해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 소송을 1년이 지난 현시점에 LG화학 측이 “말도 안 된다”며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선 것이다. 국내 대기업이 법정 다툼 와중에 장외에서 상대방을 비난하는 성명을 주고받는 극히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증거를 인멸한 정황이 드러나 ‘대응했다’고 설명했다. SK이노베이션이 2015년 994 특허 등록 이전에 LG화학의 선행기술(A7 배터리)을 빼간 것이 컴퓨터 파일로 존재했고, 소송 제기 후 SK이노베이션이 파일을 삭제한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SK이노베이션은 곧바로 반박했다. “994 특허는 자체 개발 기술이 분명하다”며 펄쩍 뛰었다. 그러면서 “특허 출원한 시점이 한참 지났는데, 당시에는 이의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기술의 유사성을 강변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LG화학은 억지 주장을 멈추고 소송에 당당하게 임하라”고 했다.
LG화학의 재반박이 이어졌다. 6일 추가 입장문을 내고 “독자 기술이 분명하면 증거를 왜 인멸했는지부터 밝히라”고 했다. “억지 주장을 누가 하고 있는 것인지는 소송 결과가 말해줄 것”이라며 “SK이노베이션은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고 경고했다.SK이노베이션도 가만 있지 않았다. 같은 날 ‘팩트 확인’이란 이름으로 입장문을 또 냈다. “우리가 증거인멸을 했다며 언급한 문서에는 LG화학의 선행기술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다”며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 꼬투리를 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LG화학이 구체적으로 자신들이 어떤 손해를 입었는지 증명을 못하니, 자꾸 증거인멸 같은 행위만 강조한다”고도 했다.
“합의하면 배임” 주장도
두 회사는 지난달 중순까지만 해도 ‘합의’ 가능성을 말했다. 실무진이 만나 서로의 상황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입장 차만 확인한 채 협상은 흐지부지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배상금에 대한 입장 차가 컸다. 기술 탈취와 관련한 ITC의 최종 판단은 다음달 5일 나온다. 상황은 SK이노베이션에 다소 불리하다. 여기서 지면 미국에서 수입금지 조치를 당할 수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돈을 물어 주고서라도 ITC 결정 전에 끝내려 했지만 액수가 문제였다.LG화학은 공공연히 “수조원을 내라”고 했다. SK이노베이션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수조원을 배상한다면 경영진이 배임 소송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 “LG화학이 피해본 금액이 정확히 얼마인지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면 거기에 맞춰 주겠다”고 맞섰다. 그러자 LG화학은 “소송에서 이기면 기술탈취에 대한 정당한 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며 “적당히 합의하면 이 또한 경영진의 배임”이라고 주장했다. 배임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측 다 ITC의 결정을 근거로 배상금을 책정할 수밖에 없다.
양사 간 합의가 어렵다면 ‘중재자’라도 나서야 하지만 역할을 할 만한 곳이 없다. 과거에는 정부가 ‘보이지 않는 손’이었지만 문재인 정부는 기업 현안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있다. 경제계 관계자는 “과거와 달리 경제 단체도 기업 간 분쟁 조정 기능을 상실했다”며 “두 회사가 물러서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말했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