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의 성장 막기 위해 일본·중국 남조와 교류하며 성장한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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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산책4세기 말까지 고구려와 백제는 100㎞ 이내의 내륙 공간에서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등장해 백제의 해양기지인 관미성을 점령, 전세가 역전됐다. 태왕은 다시 396년 수륙양면작전을 펼쳐 경기만의 58성, 700여 촌을 함락시키고 한성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해양력이 삼국의 역학관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17)백제의 적극적 국제전략
‘요서진출설’의 진실은
이후 백제는 계속되는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고 동쪽으로는 신라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왜(일본)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또 양쯔강 하류로 도피한 한족이 세운 송나라, 제나라 등 남조 국가들과 활발하게 교섭을 벌여 국제질서에 진입했다. 반면 선비족이 화북 일대에 세운 북위와 교류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위서>와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리와 승냥이 같은 것들이 길을 막았으며, (중략) 거친 물결에 배를 띄우고…’라고 기록해 바닷길이 중요했음을 알려준다. 북위도 역시 고구려의 방해가 있었고 바닷길이 험해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지 못했다.그런데 몇몇 사료의 기록을 근거로 이 무렵 백제가 요서지역을 지배했다는 ‘요서 진출설’이 주장됐다. 중국의 <송서>(488년)는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다. (중략) 백제 또한 요서를 침략해 점령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백제가 다스린 지역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기록했다. <남제서>(6세기 전반)에도 ‘백제군을 두었는데, 고려(고구려)의 동북에 있다’라고 나와 있다. 그 밖에 <양서>와 <남사>는 물론이고, <통전>(801년)은 ‘유성(현재 랴오닝성 차오양)과 북평(베이징 근처) 사이’라고 위치까지 밝혔다.백가제해에서 따온 국가명
그런데 문제는 있다. 묘하게도 <삼국사기>와 북조 계통의 역사책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또 하나는 4~5세기 전반의 국제질서다. 당시 요서지방에선 유목종족의 나라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고구려, 연나라, 후조, 동진은 발해만과 황해북부를 항해하면서 각각 군사작전과 외교, 무역을 복잡하게 벌이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하면 백제가 기마군사들을 제압할 만한 병력을 배로 운송하고 물자를 조달해가면서 장기 주둔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백제로서는 전략적인 이점이 크다. 요서를 점령하면 고구려 배후지인 요동이나 압록강 하구지역 등을 수륙으로 공격하기에 유리했을 것이다. 항해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백제의 선박들은 경기만을 출항한 뒤 고구려를 피해 산둥반도 근해에서 북상하면 발해해협을 통과해 육지에 상륙할 수 있었다. 대략 370마일(약 600㎞) 정도의 거리로, 요트를 타고 횡단하면 4~5일 걸린다. 그렇다면 고대의 쾌속선도 그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이렇게 해양활동의 메커니즘과 해양환경을 고려한다면 요서의 해안 일대에 식민도시나 상업기지 등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수서>는 ‘백제(百濟)’라는 국명을 ‘백가제해(百家濟海)’ 즉 100가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백제가 해양과 연관이 깊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위기 이겨낸 해양력
5세기 중반 이후 백제는 서해 중부의 해양력이 약화된 채 국제질서에 미숙하게 대응했다. 권력싸움과 사치로 내정도 실패했다. 그러다가 475년 장수왕의 3만 군대에 기습공격을 받아 한성이 점령당하고 개로왕은 전사했다. 다행히 피난한 세력들은 웅진(공주)에 도읍을 정하고, 현지 세력과 연합해 나라를 신속하게 재건했다. 또 일본열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중국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국제적인 위상도 회복해갔다. 이 새로운 백제의 성공에는 해양활동과 해양력의 복원이 큰 역할을 했다.(윤명철 <한국해양사>)아차산의 후미진 기슭 벼랑 위에는 ‘개로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돌무덤이 덩그러니 있다. 한강 너머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들, 고구려군의 도하 지점인 가래여울을 바라보면서.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