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읽기] 美 기술주 폭락…주식투자 '광기의 종말'인가?
입력
수정
지면A21
미국증시, 닷컴버블 때와 흡사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개발 시기, 미국 46대 대통령 선거 결과, 경기 부양책 추진, 비이성적 과열 등…. 최근 월가에서 달아오르는 논쟁들이다. 이 중 가장 뜨거운 것은 증시 앞날과 관련해 벌이는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 논쟁’이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 등은 증시에 ‘광기’가 끼었다고 경고했다.
월가선 '비이성적 과열' 논쟁
그린스펀이 Fed 의장이라면
기준금리 올려 '긴축' 전환 예상
버냉키라면 금융완화 기조 유지
파월은 '버냉키 독트린' 따르는 중
물가 불안 등 부작용 극복이 관건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비이성적 과열이란 1996년 들어 주가가 거침없이 오를 때 당시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이 처음 사용했던 용어다. 이 발언 직후 미국 주가는 20% 폭락했다.최근 미국 증시는 1996년(기술주의 경우 2000년 닷컴 버블 붕괴 직전)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이달 3일 테슬라를 비롯한 기술주 폭락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루 간격으로 사상 최고치 행진을 기록할 정도로 거침없이 올라갔다. “오늘만 같아라”, “주식시장이 미쳤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월가의 참여자들은 현재 주가 수준이 펀더멘털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점을 인정한다. 전통적인 주가평가지표인 주가수익비율(PER)로 보면 적정수준을 1.5배 정도 뛰어넘을 정도다. 주된 요인은 지난 3월 초 미국 Fed 임시회의에서 결정된 금융완화 정책에 따라 풀린 돈의 힘에 심리적인 요인이 가세하고 있기 때문이다.비이성적 과열 논쟁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금과 비슷한 제로 금리, 양적완화 등과 같은 비전통적 통화정책에 따라 주가가 올라간 금융위기 이후 10차례 넘게 지속돼 왔고 최근 논쟁도 그 연장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광기’라는 별도의 용어까지 붙은 이번 논쟁이 일어나자마자 2012년 8월에 벌어졌던 1차 논쟁의 결과를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차 논쟁을 요약하면 이렇다. ‘채권왕’으로 불린 빌 그로스는 “주식 숭배는 끝났다”고 단언하면서 채권에 투자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워런 버핏의 생각은 달랐다. 주식을 사두는 것이 유망하다고 밝히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벅셔해서웨이의 주식 보유 비중을 늘렸다. 결과는 버핏이 ‘KO승’을 거뒀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채권과 증시의 명암이 엇갈렸다.
시장에 영향이 큰 투자 구루 간 논쟁이었던 만큼 당시 Fed 전·현직 의장들도 입을 열었다. 그린스펀 전 의장은 ‘통화정책 여건이 1996년 상황과 다르기 때문에 주가 수준이 비이성적 과열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진단했다. 벤 버냉키 당시 의장도 금융위기 이후 통화정책 기조를 지속할 뜻을 재확인하면서 양적완화 조기 종료 가능성을 일축했다.그린스펀이 지적했던 통화정책 여건과 금융위기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Fed의 통화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린스펀 독트린’과 ‘버냉키 독트린’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전자는 통화정책을 추진할 때 실물경제 여건만을, 후자는 자산시장 여건까지 감안해 추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두 독트린을 광기 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최근 증시 상황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그린스펀이 Fed 의장을 맡고 있다면 현 주가 수준이 비이성적 과열이라 판단되고 실물경제 여건에 맞추기 위해 통화정책 기조가 기준금리 인상 등을 통해 ‘긴축’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이때 주가는 급락한다.
하지만 버냉키가 맡고 있다면 현 주가 수준이 비이성적 과열이라 하더라도 Fed의 양대 목표인 고용 창출이 미흡할 때에는 금융완화 정책을 그대로 밀고 나가 실물경제 회복세를 끌어올릴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금융위기 이후 10차례 이상의 비이성적 논쟁이 있을 때마다 주가가 ‘상승’ 쪽으로 결론이 났던 것도 이 때문이다.제롬 파월 의장은 버냉키 독트린에 따라 통화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직후 금융위기보다 더 과감한 금융완화 정책의 후유증으로 ‘디스인플레이션’이란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아 자산 거품이 더 심해질 우려가 있어도 종전의 기조를 밀고 나가는 배경이다. 지난 8월 실업률은 8.4%로, 고용 창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문제는 버냉키 독트린에 따른 부작용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금융완화 정책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달러화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제1선 목표인 ‘물가 안정’은 영원히 포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나온다. 금융위기로 시작된 Fed의 고난이 ‘신뢰의 위기’에 봉착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때는 ‘세계 경제 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