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말은 가짜고 노래는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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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파시즘'으로 접어든 이 사회자살하려는 순간,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어느 가수의 노래 때문에 죽음을 떨쳐낼 수 있었다는 누군가의 고백은 우리에게 ‘화두’를 준다. 노래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나도 노래에 위로받아 삶의 어둠에서 마술처럼 벗어난 경험이 있다.
정치판의 노예 돼 '말' 내뱉기 전
각자의 '노래'가 무언지 성찰해야
이응준 < 시인·소설가 >
미국 작가 커트 보니것은 2차 세계대전 참전 중 드레스덴의 지하 정육창고에 독일군 포로로 잡혀 있었다. 연합군 전투기들은 사흘 밤낮으로 드레스덴에 히로시마 원폭에 버금가는 폭탄을 투하했다. 상황이 끝난 뒤, 13만 명 이상이 재로 변한 돌무더기 폐허 위로 기어 올라온 청년 보니것은 2004년 4월 17일 당대의 가장 유명한 노인이 돼 이스턴 워싱턴대 졸업식 초청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 나라가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곳이 될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인간이란 권력에 취한 침팬지입니다.” 한데 이토록 비관적인 보니것이 이어서 미리 밝힌 자신의 묘비명은 ‘그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했던 유일한 증거는 음악이었다’였다. 그는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장의 트라우마를 노래의 힘으로 극복하고 블랙코미디의 대가가 됐음을, 저기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래의 힘으로 자살에서 놓여난 누군가처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노래는 말처럼 설명하지 않는다. 노래는 듣는 순간 영혼을 사로잡고 삶을 환기한다. 그 자체로 증명되는 진실이자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가수가 정치판의 ‘자발적 노예’가 돼 버리면, 그의 노래들은 어쩔 수 없는 선입견 속에서, 사람들에게 가 닿기 전에 상당 부분 시들거나 유실된다. 물론 인생은 각자 자신의 것이다. 당연히 뮤지션에게도 마찬가지다. 뭐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면 된다. 다만 한 번쯤은 세속의 기준에서가 아니라 보다 높고 깊고 근본적인 측면에서의 손익을 숙고해볼 필요는 있다. 내가 뮤지션으로서 하는 이 ‘말’이, 누군가를 절망과 죽음에서도 구해내는 나의 ‘노래’를 훼손할 가능성에 대한 판단과 입장 말이다.
선한 동기의 일들이 악한 결과들을 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꼭 경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인간과 세상과 삶에 대한 지성을 얻는다.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그 생각이 그 생각이 아닐 수 있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악몽을 나는 알지 못한다. 버트런드 러셀은 지구를 “은하계 정신병원”이라고 불렀다. 하물며 이 이상한 나라의 정치가 이 지경인 것은 정신병리의 대상을 자꾸 정치분석의 대상으로 오인하는 비뚤어진 애정 때문이다. 정치인은 ‘그 누구라도’ 감시와 비평의 대상이지 추종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치 불신’이다. 이 사회는 정치적 진영을 떠나 이미 ‘대중파시즘’으로 접어들었다. 민주제도에는 불참하지 않으면서 모든 정치인을 의심하는 태도는 파시즘에 대한 유일항체다. 당신에게 정치 불신을 권한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본분과 직업에 있어서의 ‘노래’가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 욕심 때문에 모른 척할 뿐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내가 판검사이고 내가 교사이고 내가 군인이고 내가 개그맨이고 내가 종교인이고 또 그 무엇이어도 각자의 ‘노래’는 있다. 이 ‘노래들’이 정치난장으로의 매몰로 인해 제 맛과 빛을 잃은 나라는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곳이 될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나라이고, “권력에 취한 침팬지들이” 지배하는 나라다.
구관조는 말을 하기에 새장에 갇혀 산다. 사람에 비해 말을 잘 하는 것도 아니다. 말을 하지 않고 노래했다면 그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보니것은 2007년에 죽었다. 나는 그의 묘비명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어쩐지 이 말이 노래처럼 새겨져 있을 것만 같다. ‘말은 가짜고 노래는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