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 동원해 찍어낸 서울사랑상품권, 4000억중 절반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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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회복 '마중물 역할' 미미서울시가 올해 두 차례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찍어낸 4000억원 규모의 서울사랑상품권이 전체 발행액의 절반만 소비된 것으로 드러났다. 추경까지 동원해 지역화폐 발행량을 늘렸지만 침체된 소비를 회복시킬 마중물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제액 적은 건 '체리피커' 탓
미리 구매 후 고정지출에만 사용
정부, 전국 결제율도 파악 못해
21일 서울시의회 기획경제위원회가 작성한 서울시 4차 추경안 예산심사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시가 올 들어 지난 8월 26일까지 발행한 서울사랑상품권 4185억원어치 중 결제액은 2367억원(56.6%)에 그친 것으로 집계됐다. 판매액은 3871억원으로 전체 발행액 대비 판매율은 92.5%에 달했다. 소비자들이 높은 할인율에 끌려 상품권을 사기는 했지만, 이를 쓰지 않고 보유하고 있어 사용률이 떨어진다는 분석이다.서울시는 본예산에 136억원을 편성해 올해 2000억원 규모의 서울사랑상품권을 발행할 예정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줄어든 소비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두 차례 추경을 통해 185억원을 확보, 상품권 발행액을 두 배 가까이 늘렸다. 하지만 이 중 절반만 소비로 이어지고, 나머지는 소비자 지갑 속에서 잠긴 것이다.이런 상황에서도 서울시는 4차 추경에 67억원을 추가로 편성해 지난 16일부터 서울사랑상품권을 1000억원어치 더 찍어내고 있다. 시중에 상품권이 더 풀리자 21일 기준 결제율은 52.8%로 떨어졌다. 서울시는 “시간이 지나면 결제율은 자연스럽게 올라갈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발행액의 절반만 사용된 상황에서 추경까지 편성해 상품권을 추가 발행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다른 지자체가 발행하는 지역화폐의 상황도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올해 지역화폐 발행 지자체는 229곳, 발행 규모는 9조원으로 급증했다.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행정안전부는 전국에서 발행된 지역화폐의 사용률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사용 절반에 그친 지역화폐
판매액 많아도 결제는 적어…서울시 흥행 내세워 예산 확대
“지역화폐는 저축을 할 수 없고 반드시 소비해야 해 ‘승수효과’가 큽니다.”이재명 경기지사가 지난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지역화폐의 경제 활성화 효과를 추켜세우며 올린 글이다. 승수효과란 어떤 경제요인의 변화가 연쇄적으로 파급력을 갖고 몇 배에 이르는 이익을 가져올 때 쓰는 표현이다. 하지만 서울사랑상품권의 사례를 놓고 봤을 땐 ‘반드시 소비해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할인 판매하는 상품권을 구입해 쟁여놓고, 고정지출에만 사용하는 소비자가 늘면서 상품권 판매가 곧바로 시장에서의 지출 증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판매된 상품권 절반만 소비로
올해 처음 발행되기 시작한 서울사랑상품권은 겉으로 보기엔 성공한 정책으로 보인다. 올해 본예산에 편성된 136억원으로 찍어낸 2000억원 규모의 상품권은 상반기가 지나가기 전에 다 팔렸다. 2차 추경을 편성해 발행한 400억원 규모의 상품권은 발행 당일 ‘완판’됐다. 캐시백까지 더하면 액면가격의 최대 20%까지 할인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입소문이 난 결과다. 서울시는 상품권 흥행을 홍보하며 추경 때마다 예산을 추가로 편성해 발행 규모를 늘렸다.하지만 실제 결제액으로 본 실상은 다르게 나타났다. 판매된 상품권이 실제 소비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지난달 4차 추경안을 제출할 당시, 지난 1월 본예산으로 발행한 2000억원 규모 상품권의 사용률도 76.8%에 머문 상태였다. 5월과 7월에 2·3차 추경을 통해 발행한 상품권의 사용률은 각각 61.5%, 32.8%에 그쳤다. 본예산에 더해 두 차례나 추경을 통해 발행한 상품권 4185억원 중 겨우 절반이 사용된 셈이다.서울시의회 기획경제위원회도 4차 추경안 예비심사 보고서에서 “상품권 발행이 실제 소비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사용 독려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서울시는 4차 추경에서 67억원의 예산을 확보하고 1000억원 규모의 상품권을 추가로 더 찍었다.
판매액에 비해 결제액이 크게 못 미치는 이유는 상품권을 미리 구매한 뒤 고정지출에만 야금야금 사용하는 ‘체리피커’족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서울지역 맘카페에선 상품권 추가 발행 때가 되면 “일단 사용처를 고민하지 말고 구매부터 해야 한다”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상품권 사용처가 전통시장과 소상공인으로 한정돼 있지만 학원비로 결제가 가능해 사놓는 게 이득이라는 설명이다. 중학생 자녀를 둔 40대 직장인 A씨는 “발행 때마다 상품권을 사 놓고 매달 자녀 학원비로 결제하고 있다”며 “별다른 할인 혜택이 없는 학원비를 10~15%가량 아낄 수 있어 앞으로도 이 같은 방식을 이용할 생각”이라고 말했다.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고정지출에 가까운 자녀 학원비를 할인받아 구매한 상품권으로 결제하는 방식의 대체지출로는 경제 활성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며 “지역 상품권 자체가 사용 지역에 제한이 있어 지출을 늘리기도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사용률 파악도 못한 행안부
2016년 1168억원에 불과하던 지역화폐 발행 규모는 올해 9조원으로 4년 만에 약 77배 급증했다. 발행 지방자치단체 수도 53곳에서 229곳으로 늘었다. 243개 지자체 중 94.2%가 지역화폐를 발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행정안전부는 올해 전국에서 발행된 지역화폐의 실제 사용률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고기동 행안부 지역경제지원관은 “올해 긴급재난지원금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지자체가 있어 순수하게 지자체에서 발행한 지역화폐의 반환율(실제 사용률)을 아직까지 집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정치권에서는 경제적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지역화폐의 발행액을 내년에 더 확대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17일 “지역화폐가 코로나 상황에도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역화폐 정책은 사실상 현금 복지이자 질 나쁜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며 “경제적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지역화폐의 발행 규모를 늘리는 것은 예산 낭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비판했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