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20여명 무더기 호출…정책국감 한다더니 '악습' 되풀이

"부르고 보자"
'기업인 망신주기 국감'으로 변질

여야, 업종 안 가리고 증인신청
국감서 호통치는 구태 반복 우려
올해도 기업인들이 국회 국정감사장에 서서 의원들의 호통을 듣는 ‘익숙한 장면’이 연출될 전망이다. 여야 의원들이 앞다퉈 기업인을 국감 증인으로 신청하면서다. 이유를 불문하고 총수나 최고경영자(CEO)를 일단 부르고 보는 관행과 여러 명의 기업인을 한꺼번에 호출하려는 구태도 반복되고 있다. 경제계에서는 “기업인 증인 신청을 자제하고 정책국감을 만들자”는 의원들의 다짐은 ‘빈말’이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올해도 무더기 증인 신청

23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회 정무위원회 여야 의원만 해도 20명 이상의 기업인을 국감 증인으로 부르겠다고 신청했다. 이들이 신청한 기업인 명단을 보면 자동차 인터넷 금융 건설 유통 등 분야와 업종을 가리지 않았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정부의 정책 실패를 따지겠다는 건지, 민간 기업을 감사하겠다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고 꼬집었다.

증인 신청 사유가 무엇이든 간에 최고위 경영진을 부르는 행태도 되풀이됐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차량 결함 문제를 이유로 총수인 정의선 수석부회장을, 같은 당 오기형 의원은 네이버부동산의 독과점 문제를 이유로 해외사업을 전담하고 있는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복합쇼핑몰 입점 문제로 증인 신청 명단에 포함됐다. 4대 금융그룹 회장도 모두 국감장에 설 위기다. 업계에서는 증인 신청 사유에 맞게 구체적인 질의를 하려면 담당 업무를 맡은 실무진을 증인으로 부르는 게 합당하다는 반발이 나오지만, 의원들은 이런 의견을 외면하고 있다.특정 기업의 인사가 아니라 주요 기업 소속 인물을 한꺼번에 부르겠다는 의원도 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 소속 정운천 국민의힘 의원은 10대 그룹 고위 임원을 모두 신청하겠다는 뜻을 위원장 및 간사에게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각 기업이 농어촌 상생협력기금 출연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이유다. 기업들로선 기금을 출연해야 할 의무가 없지만, 정 의원은 고위 임원들을 압박해 출연 약속을 받아내겠다고 나섰다.

정책국감 한다더니…

경제계에서는 국회의원들이 ‘갑질 본능’을 버리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경제단체 부회장은 “일부 국회의원은 기업인들을 불러 잘못을 꾸짖는 모습을 연출하고 싶어서 무리하게 총수급을 증인으로 신청한다”며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기업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행태”라고 꼬집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경영환경이 그 어느 때보다 나빠진 상황에서 기업인을 호출하겠다는 의도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 대기업 CEO는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기분으로 경영 활동을 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최고경영진이 국회에 출석해 직접 관여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 답변하는 건 기업으로선 큰 출혈”이라고 호소했다.국회의원들이 기업인 소환을 자제하고 정책국감을 하겠다고 선언해 놓고선 자신들이 한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여당 간사인 김병욱 민주당 의원 등은 “올해 국감은 정책 위주로 이뤄져야 한다”며 기업인 증인 신청에 비판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민주당 정무위 소속 의원들이 무분별하게 기업인을 증인으로 신청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정치권에서는 여당인 민주당 내 반(反)기업 성향이 강한 일부 의원이 지도부와 조율 없이 증인을 무리하게 신청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여당의 반기업 공세에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 야당도 여당 의원의 증인 신청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