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살부터 시신훼손까지…6시간 지켜만 본 軍 [종합]

군 "사살할 것 알았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것"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대응 못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인 서주석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이 24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연평도 실종 공무원 피격 사망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실종된 해양수산부 소속 어업지도 공무원 A씨가 북한군에 피살된 다음 현장에서 시신이 불태워진 것으로 밝혀졌다. 화장됐다는 당초 정부 발표와는 차이가 있다. 우리 군은 이런 장면을 관측장비로 확인하고 6시간 가량이나 실시간으로 지켜봤지만 별다른 대응은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군 관계자는 24일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바로 (A씨를)사살하고 불태울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며 "우리도 북측이 우리 국민을 몇 시간 뒤 사살할 것이라 판단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적 지역에 대해 즉각 대응하기가 어려웠다"고 설명했다.군 관계자는 "22일 오후 3시30분쯤 북한 수산 사업소 소속 선박이 등산곶 인근 해상에서 한명 정도 탈 수 있는 부유물에 탑승한 기진맥진한 상태의 실종자를 최초 발견한 정황을 입수했다"며 "이때부터 북한 선박이 실종자와 일정 거리를 이격한 상태에서 방독면을 착용한 뒤 표류 경위와 월북 관련 진술을 들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던 북한은 돌연 단속정을 현장으로 보내 약 6시간 만인 오후 9시40분께 A씨에게 총을 쐈다. 오후 10시11분에는 시신에 기름을 붓고 불태웠다.

북한군은 상부 지시로 A씨를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군 감청에 북한군 상부 지시가 하달되는 내용이 포착됐다고 한다.국방위 소속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천인공노할 만행"이라며 "(북한이)실종된 우리 국민을 의도적으로 사살하고 불태웠다"고 분노했다.

하태경 의원은 "국방부 합참에서 제가 보고받은 내용을 종합하면 북한이 실종 공무원에게 저지른 행위는 테러집단 IS 못지 않다"며 "바다에 떠 있는 사람을 총살하고 그 자리에서 기름을 부어 시신을 불태웠다. 시신을 태운 것을 화장했다고 보도하는 언론이 있던데 이건 화장이 아니라 시신을 훼손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바다에 수장을 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 소속 김근식 경남대 교수도 "월북의사를 밝혔으면 일단 진술을 듣고 의거입북시키든지 법적절차에 따라 강제추방하든지 대남송환하는 게 최소한의 상식이고 인도적 조치"라며 "신병을 확보하고도 월북 의사를 듣고도 상부지시로 사살했다는 것은 상식과 인륜을 벗어난 즉결처분이다. 기름을 부어 시신을 불태우고 유기했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야만적 행위"라고 북한을 맹비난했다. 북한이 비인도적인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군은 해당 사실을 이틀이나 지나 공개해 논란이 일고 있다.

배준영 국민의힘 대변인은 "정부가 종전선언 제안이라는 이벤트를 위해 국민의 생명을 뒷전에 밀어 놓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에 따르면 이 같은 내용은 모두 청와대에 보고됐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23일(한국시간) 화상으로 진행된 제75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남북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하태경 의원은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진다. 우리 국민이 총에 맞아 죽고 시신이 불태워졌는데 북한에 구애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북한 인권에 눈감더니 이제는 우리 국민의 생명마저 외면하나"라며 "문 대통령이 유엔연설에서 하셨어야 할 말은 공허한 종전선언이 아니다. 북한의 인권 만행, 우리 국민 살인에 대한 강력한 규탄과 그에 상응한 대응조치를 천명하셨어야 한다. 국민을 지킬 의지가 없다면 대통령 자격도 없다"고 했다.

청와대는 "종전선언 연설은 15일 녹화됐고, 18일 유엔에 보냈다"며 "수정할 상황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23일 열린 군 장성 진급 및 보직 신고식에서도 북한에 대한 경고없이 평화를 강조하는 메시지를 냈다.

이날 문 대통령은 "평화의 시대는 일직선으로 곧장 나 있는 길이 아니다. 진전이 있다가 때로는 후퇴도 있고, 때로는 멈추기도 하고, 때로는 길이 막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며 "이럴 때 국방력은 전쟁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안전판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A씨는 자녀 2명을 두고 있는 평범한 40대 가장으로 평소 특이사항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야권에선 "A씨가 단순 표류하다 북한에 접근했거나, 남측 지역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에 피격당했을 가능성도 있다"며 "남북관계 악화를 우려한 정부가 일방적으로 월북이라고 발표한 것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해 군 당국은 "A씨가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있었고, 당시 신발을 벗고 북측에 접근했다"며 월북으로 추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A씨의 직장 동료들은 A씨가 빚 때문에 파산 신청을 고려했을 정도로 힘든 상황이었다고 증언했다.

서해어업단 직원에 따르면 A씨는 4개월 전에 이혼했으며 동료 직원 다수로부터 돈을 빌린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법원으로부터 급여 가압류 통보까지 전달받아 A씨가 심적 부담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A씨의 친형은 언론 인터뷰에서 "A씨가 월북했다는 군 당국의 얘기는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친형은 "명색이 공무원이고, 처자식도 있는 동생이 월북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24일 오전 공무원 A씨(47)가 탑승한 어업지도선(무궁화10호, 499톤)이 소연평도 남방 5마일 해상에 떠 있다. 사진=뉴스1
북한군이 월북 의사를 밝힌 우리 국민을 현장에서 사살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군 당국은 일단 북측 경계병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접경지역 방역 지침에 따라 A씨에게 총격을 가한 뒤 시신을 불태운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국민의힘 외교안보특위는 "과거 우리 국민 월북으로 북한군이 문책을 받았다고 한다. 비슷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그런 무지막지한 짓을 하지 않았나 짐작한다"고 추정했다.

군은 24일이 되어서야 사건을 공개하고 북한에 공식 항의했다.

안영호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은 이날 오전 '서해 우리국민 실종사건 관련 입장문'에서 "우리 군은 북한의 이러한 만행을 강력히 규탄하고 이에 대한 북한의 해명과 책임자 처벌을 강력히 촉구한다"며 "아울러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만행에 따른 모든 책임은 북한에 있음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했다.

청와대도 뒤늦게 NSC(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개최해 "북한군의 행위는 국제 규범과 인도주의에 반하는 행동으로 우리 정부는 이를 강력 규탄한다"고 밝혔다.

서주석 NSC 사무처장은 춘추관 브리핑을 통해 "북한군이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고 저항의사도 없는 우리 국민을 총격으로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북한은 이번 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진상을 명명백백 밝히는 한편 책임자를 엄중 처벌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명일 한경닷컴 기자 mi737@hankyung.com
다음은 군이 파악한 사건 발생 일지

▶ 9월21일 (월)

오전 11시30분 군, 해양수산부 소속 관공선 승조원 1명 실종 신고 접수.

오후 1시50분 해경, 해군, 해수부 선박 20척 및 해경 항공기 2대 해상정밀수색 실시.

오후 6시∼ 대연평도, 소연평도 해안선 일대 정밀 수색.

▶ 9월22일 (화)

오후 3시30분 한국 군, 북한 수상 사업소 선박이 등산곶 인근 해상에서 구명조끼 입은 채 부유물에 탑승한 실종자 최초 발견한 정황 입수.

오후 4시40분 (한국 군 분석 결과) 북한군, 방독면을 착용하고 실종자와 일정 거리 떨어진 상태로 실종자의 표류 경위 확인. 월북 진술 청취.

오후 9시40분 북 단속정, 상부 지시에 따라 실종자에 사격.

오후 10시 북한군, 방독면 및 방호복 착용한 채 시신에 접근해 불 태움. 연평도에 있는 한국 군 감시 장비도 오후 10시11분께 ‘불꽃’ 포착. 시신을 불태우는 상황을 관측.

오후 11시∼자정 사이 군, 해당 사실 국방부 장관에 보고.▶ 9월23일 (수)

오후 4시35분 유엔사와 합의 아래 북측에 대북 전통문 발송. 실종 사실 통보. 북에 이와 관련된 사실을 조속히 통보해 줄 것을 통보했으나 현재까지 북측으로부터 답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