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친서'가 확인시켜준 대북 저자세외교 [여기는 논설실]

사진=연합뉴스
청와대가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간 오간 서신을 며칠 전에 공개했다. 남북 정상의 친서교환은 지난 3월 이후 6개월여 만이다. 이례적으로 공개된 정상간 서신은 내용면에서 평이하다. 문대통령은 "재난 현장을 찾아 피해복구를 가장 앞에서 헤쳐 나가고자 하는 모습을 깊은 공감으로 대하고 있다"며 "생명존중에 대한 강력한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고 김정은을 추켜세웠다. 서신을 보낸지 나흘 만에 김정은의 답장이 도착했다.

특별한 용건없이 코로나사태 국면에서 서로 위로의 말을 전하는 안부 편지지만 적잖은 파장을 불렀다. 특히 문 대통령으로선 오매불망 기다리던 연락이 성사돼 최소한의 연락채널을 구축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문 대통령을 은근슬쩍 하대(下待)한 김정은

'공무원 피격 사건'으로 코너에 몰린 여권 전체에도 복음이 됐다. '살인자가 사과한다고 감읍하느냐'는 비판이 거세지만 어쨋거나 사건 파장은 상당 정도 진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공개된 남북 정상간 친서를 조금만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이건 아닌데…'라는 걱정을 떨치기 어렵다. 김위원장이 문대통령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고 있어서다. 김정은 편지의 마지막은 "문재인 대통령과 녀사님께서 무탈하시기를 기원합니다"로 끝난다. 문 대통령이 "국무위원장님과 가족분들께서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로 끝맺은 데 대한 정확한 댓구다.

그런데 문대통령은 '국무위원장님'이라고 호칭한데 비해 김정은은 '대통령님'이라는 존칭을 붙이지 않고 그냥 '대통령'으로 썼다.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뉘앙스다. '혹시 실수일까'라는 생각으로 편지를 훓어보면 바로 몇 문장 앞에서도 같은 호칭이 발견된다. "나에게 와닿은 대통령의 친서를 읽으며 글줄마다에 넘치는 진심어린 위로에 깊은 동포애를 느꼈습니다"라고 한 대목이다. 실수가 아님이 분명해진다. 북이 사용하는 어법이나 존칭이 남한과 다른 것일까. 아니다. 북에서는 오히려 직위 뒤에 적절한 호칭을 넣는 게 일반적이다.2014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서 전달한 친서에서 김정은은 현회장에게 '선생'이라는 말을 붙여 예우했다. "현정은회장선생의 사업에서 언제나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앞으로 회장선생이 평양을 방문하면 반갑게 맞이하게 될것입니다"라고 맺음말을 썼다.

◆북의 능수능란 외교술에 속수무책

외교는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는 영역이다. 정상간의 말도 어떤 자리에서 어떤 경로로 건네졌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외교에서 의전이 중요시되는 이유다. 절대존엄이 있는 북한 외교는 특히 의전에 능수능란하다. 의전으로 물을 먹이고 의전을 통해 실익을 챙긴다.

이달초 미국 CNN에 공개된 친서에서 김정은은 트럼프를 각하(Your Excellency)라는 최고의 존칭으로 불렀다.영어로 격식을 차리려다보니 그런 단어가 사용됐을 것이라 자위하고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작년 6월 갑작스레 약식으로 성사된 판문점 미북정상회담 모두 발언에서 김정은은 트럼프를 눈앞에 두고 우리 말로 2번이나 '각하'라 불렀다. "각하와 나의 훌륭한 관계가 아니라면 하루만에 이런 상봉이 전격적으로 이뤄지진 못했을 것" "각하와의 훌륭한 관계가 남들이 예상 못하는 좋은 일들을 계속 만들면서 난관과 장애를 극복하는 신비로운 힘으로 될 것"이라는 발언들이다. 김정은은 시진핑 중국주석에게도 아부성 호칭을 쓴다. 작년 6월 시 주석 방북당시 축사에서 '가장 존중하는 중국 귀빈'이라고 칭하며 최고의 예우를 갖췄다. 이런 여러 측면을 고려해 볼 때 친서에 나타난 김 위원장의 호칭이 홀대라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 김정은은 문대통령 장남 준용씨보다 두살 아래다. '민족'을 입에 달고 사는 동방예의지국에서 부적절한 호칭임은 분명하다.

◆대중사대주의·대북 저자세외교의 참사

'외교는 격에서 시작해 격에서 끝난다'는 말은 다소 경망스럽지만 외교현장에서 힘을 발휘하는 진리다.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미국은 최근부터 시진핑 주석을 대통령이라 부르지 않고 총서기로 바꿔 부르고 있다. 총서기는 당의 사무총장을 일컫는 직위다. 시주석을 '중국 대표'가 아닌 '중구공산당 대표'쯤으로 보겠다는 일종의 격하다. 물론 무역전쟁, 홍콩보안법, 신장위구르 인권문제,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등 고조되는 외교갈등을 반영한 호칭 변경일 것이다.

동시에 미국은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을 대통령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1979년대만과 단교후 공식문서상에서 대만을 정부(government)가 아닌 당국(authorities)으로 칭해온 것과 완전히달라진 분위기다. 호칭 변경을 통해 중국보다 대만을 우위에 두는 듯한 행보를 보이며 외교적 기선제압에 나선 것이다. 외교 관례상 친서 공개에는 상호 합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일련의 전개에 북한의 의도가 개입됐다는 추정이 합리적이다. 남한 당국에 큰 선물을 주게 될 서신공개에 북한이 동의한 이유 중에 '대남 우월의식' 확산이 있지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우리 정부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대통령 지시"라며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TV카메라 앞에 직접 섰다. 얼마나 급했으면 최고 권부에서 적장의 편지를 떠받들 듯 줄줄 읽어내렸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면 답답함을 금할 길 없다. 김정은과 북한은 '남북관계 주도권을 확실히 잡았다'며 흐뭇해하고 있지 않을까. '공무원 피살'이라는 만행에 대해 석고대죄를 받아도 시원치 않을 판에 국격추락을 자초한 어이없는 상황의 전개다. 대중사대외교에 이은 대북저자세 굴종외교의 결과가 참담하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