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발열감지기는 체온계'라며 불법 딱지 붙인 정부

뒤떨어진 잣대에 첨단제품 고사 위기
4차 산업혁명…규제도 '파괴적 혁신' 필요

이정선 중소기업부 차장
요즘 지하철이나 건물 로비 등에 신속하게 체온을 측정하는 ‘얼굴인식 발열 감지 카메라’가 많이 설치돼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개발된 비대면 방식의 혁신 제품이다.

K방역의 성공 사례로 볼 수 있는 이 제품은 최근 예상치 못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발열 감지 시스템도 일종의 체온계라는 이유로 불법 의료기기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이를 생산하는 한 중소기업은 지난달 식약처로부터 압수수색까지 받았다. 의료기기 인증을 받지 않고 제품을 판매했다는 이유에서다. 관련 업계는 “대한민국에서 이 제품을 의료기기라고 인식하는 건 식약처가 유일할 것”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정부의 낡고 경직된 잣대가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는 하소연이다.최근 주차 로봇을 개발한 한 중소기업도 비슷한 이유로 판로 확대에 애를 먹고 있다. 로봇으로 차량을 들어 올려 같은 면적에서 주차 대수를 30% 이상 늘릴 수 있지만, 현행 주차장법에 로봇을 설치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아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첨단기술을 장착한 기업들이 잇달아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고 있지만, 이를 뒤쫓아가지 못하는 정부 규제의 장애물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면 범법자로 전락한다’는 자조적 농담까지 회자될 정도다. 대학생 창업이 90%에 이르는 이스라엘과 달리 한국이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건 이런 경직된 규제환경과 무관치 않다.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 가치나 도덕 기준이 없는 혼돈 상태라는 점에서 ‘경제적 아노미 상태’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기존의 ‘포지티브’(원칙금지·예외허용) 규제를 ‘네거티브’(원칙허용·예외금지)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들이 우선 자유롭게 개발하고 새로운 혁신을 시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네거티브 규제로의 전환은 문재인 정부 공약이기도 하다. 현실은 어떨까. 기업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여전히 썰렁하다. 산업단지에 입주해 있는 세탁업체들의 불만이 대표적이다.부산의 녹산 염색단지 등 전국 산업단지에는 병원에서 환자복, 이불 등을 수거해 세탁하는 특수세탁 업체가 다수 입주해 있다.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세탁업의 특성을 고려하면 대규모 폐수정화시설을 활용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산업단지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가동률이 갈수록 떨어져 빈 공장이 수두룩한 산업단지도 세탁업체 입점을 반기고 있다.

그러나 산업단지에 있는 세탁업체들은 몇 년째 불법 입주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산업단지 입주 가능 업종이 제조업으로 제한돼 있어서다. 이 같은 민원을 받아들여 뒤늦게 산업통상자원부가 네거티브 방식을 도입하겠다며 지난 5월 ‘산업집적활성화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했지만, 여전히 관리 지침으로 세탁업의 입주를 막고 있다. 보다 못한 중소벤처기업부가 나서 제도 개선을 유도했지만 요지부동이다.

낡은 규제와 새로운 혁신의 갈등은 앞으로도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 로봇을 비롯해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 등 신산업 분야가 꿈틀거리고 있어서다. ‘타다’ 서비스를 둘러싼 갈등도 따지고 보면 기존 질서와 혁신 아이템 간의 충돌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 ‘파괴적 혁신’이 시급한 시대에 도움은커녕 쪽박을 깨는 게 요즘 정부의 행태다.

leew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