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국시 무산 위기…의대생 사과보다 정부의 낮은 자세가 더 시급[여기는 논설실]
입력
수정
매년 3000여명씩 배출되는 신규 의사가 올해는 400여명에 그칠 위기다. 공공의대 신설 등 정부의 일방적 의료정책에 반발한 지난 8월 '의사 파업' 당시 의대생들이 가장 격렬하게 저항해 본과 4학년의 86%가 의사 국가고시를 거부한 여파다. 응시대상 3172명의 14%인 446명만이 의사국시에 응시한 상태다.
대한의사협회와 더불어민주당이 지난달 '원점 재검토'에 전격 합의한 뒤 의사 파업은 풀렸지만 의대생들은 국시 거부 의사를 철회하지 않았다. "정부 여당이 언제든지 밀어붙일 수 있는 엉커리 합의"라며 평가절하했기 때문이다. 결국 최근 "응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정부는 "형평과 공정에 맞지 않다"며 재응시 불가를 천명했다. 의사배출이 90% 가까이 급감하면 의료시스템 전반에 큰 후폭풍이 예상된다. 수련병원의 전공의는 물론이고 공중보건의, 군의관 부족이 불가피하다. 큰 병원에서는 레지던트가 인턴일까지 다해야 하는 막막한 상황이 전개된다. 공중보건의는 지역 보건소나 오지 등에서 복무하는 경우가 많아 도서지역 피해도 막대할 전망이다. 내년 한 해 만의 문제도 아니다.전공의 1,2년차가 계속 줄어 수년에 걸쳐 의료시스템에 지속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사태를 막으려면 재응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일정상 이달 20일까지 원서가 접수돼야 연내 의사배출이 가능한 상황이다. 꼬인 사태를 풀려고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인하대 등 주요병원장들이 지난주말 서울정부청사에서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에 앞서 사립대학교의료원협의회, 사립대학교병원협회, 국립대학교병원협회 등도 ‘의사 국가고시 정상화를 위한 의료계 선배들의 호소문’을 내고 재응시 기회를 요청했다. 의료계 전체가 고개를 숙이고 나선 모양새다.
하지만 정부는 "이미 원서 접수 기간을 두 차례나 연장해줬다"며 '재응시 불허' 방침을 고수했다. 보건복지부는 병원장들의 ‘사과 기자회견’ 다음날 "국민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또 국민적 공감대가 없는 상황에서 국시 재응시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국시 문제는 어떤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정부가 재응시 불가 사유로 제시한 '국민 공감대 부재'와 '형평성 위배' 주장은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지난달 한 여론조사를 보면 재응시 허용에 대해 '반대 54%' '찬성 43%'다. 반대가 높지만, 응답자들이 의료서비스 불편을 겪는 이해당사자라는 점에서 수치를 액면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직역이기주의의 성격이 있음에도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재응시에 동의했다는 점은 의대생들에 대한 지지가 상당하다는 의미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의 ‘의대생 구제 반대 청원 ' 동의가 60만명에 달했다지만 이 역시 국민 의사의 정확한 대변은 아니다. 반대로 '구제해줘야 한다'는 청원이 걸렸다면 그 역시 적잖은 지지를 모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국가 주관 시험 재응시 허용 전례가 없다는 정부주장도 엄밀하게 보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의사국시만 해도 번복 전례가 있다. 2000년 의약분업사태 때 시험 거부 사태가 벌어졌고, 분쟁 마무리후 정부는 국시 일정을 조정해 의대생들의 시험을 허용했다. 90%를 웃돌던 의사 국시 합격률이 60%대로 크게 떨어진 1995년, 1996년에도 2년 연속으로 재시험을 치러 탈락자 상당수를 구제했다. 더 근본적으로는 사태의 원인과 책임을 짚어봐야 한다. 의대생들의 투쟁은 잘못된 의료정책에 대한 저항 차원이었다. 코로나19가 재확산한 가운데 의료계 이해가 첨예한 △공공의대 설립 △의대정원 400명 증원 △지역의사 3000명 양성 △원격 의료 확대 등을 졸속으로 밀어붙이는 정부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었다.제대로 된 공청회 한번 없었고, 시민단체 추천으로 공공의대생을 모집하는 등의 구상이 알려지자 여론도 파업에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의사와 환자, 의사와 간호사를 편 갈라 여론전을 펼치는 위선적 민낯까지 드러나자 정부가 사실상 백기를 들고 만 게 지난 여름 의료파업 사태의 경과다.
의대생의 투쟁이 한국의료정책의 궤도이탈을 막는 데 기여했건만 지금 와서 "의사고시 응시 허용에 대한 합의는 없었다"며 모르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식의 여당 대응도 어른스럽지 못하다. 합의문의 잉크도 마르지 않았는데 의대생들이 우려한대로 정부 여당은 벌써 원안 재추진을 모색중이다. 의사들의 저항의 싹을 자를 심산인지 의료계 탄압 법안도 봇물이다. 재난 발생 시 의료 인력 강제동원법, 북한에 의료 인력파견하는 남북 보건의료 교류협력법, 대체조제 활성화법 등이다. 의사 면허 취소 조건 완화법과 면허 영구취소법까지 발의됐다.
국가의료시스템을 볼모로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비겁하기 그지없는 행태다. 국가는 국민과 공익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감정에 휩쓸려 의대생을 죄인다루듯 하고 인민재판식으로 사태를 처리하는 것은 국정운영이 아니라 싸구려 정치에 불과하다. 물론 '밥그릇 지키기'의 측면이 있을 것이고 의대생들의 행동이 최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이익을 감수하고 목소리를 낸 의대생들을 집단이기주의로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과잉이다. 설사 잘못이 있더라도 항복을 요구하기보다 우수한 인재들이 우리 사회의 중추로 성장할수 있도록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의대생의 사과보다 정부의 낮은 자세가 더 시급하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대한의사협회와 더불어민주당이 지난달 '원점 재검토'에 전격 합의한 뒤 의사 파업은 풀렸지만 의대생들은 국시 거부 의사를 철회하지 않았다. "정부 여당이 언제든지 밀어붙일 수 있는 엉커리 합의"라며 평가절하했기 때문이다. 결국 최근 "응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정부는 "형평과 공정에 맞지 않다"며 재응시 불가를 천명했다. 의사배출이 90% 가까이 급감하면 의료시스템 전반에 큰 후폭풍이 예상된다. 수련병원의 전공의는 물론이고 공중보건의, 군의관 부족이 불가피하다. 큰 병원에서는 레지던트가 인턴일까지 다해야 하는 막막한 상황이 전개된다. 공중보건의는 지역 보건소나 오지 등에서 복무하는 경우가 많아 도서지역 피해도 막대할 전망이다. 내년 한 해 만의 문제도 아니다.전공의 1,2년차가 계속 줄어 수년에 걸쳐 의료시스템에 지속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사태를 막으려면 재응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일정상 이달 20일까지 원서가 접수돼야 연내 의사배출이 가능한 상황이다. 꼬인 사태를 풀려고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인하대 등 주요병원장들이 지난주말 서울정부청사에서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에 앞서 사립대학교의료원협의회, 사립대학교병원협회, 국립대학교병원협회 등도 ‘의사 국가고시 정상화를 위한 의료계 선배들의 호소문’을 내고 재응시 기회를 요청했다. 의료계 전체가 고개를 숙이고 나선 모양새다.
하지만 정부는 "이미 원서 접수 기간을 두 차례나 연장해줬다"며 '재응시 불허' 방침을 고수했다. 보건복지부는 병원장들의 ‘사과 기자회견’ 다음날 "국민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또 국민적 공감대가 없는 상황에서 국시 재응시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국시 문제는 어떤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정부가 재응시 불가 사유로 제시한 '국민 공감대 부재'와 '형평성 위배' 주장은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지난달 한 여론조사를 보면 재응시 허용에 대해 '반대 54%' '찬성 43%'다. 반대가 높지만, 응답자들이 의료서비스 불편을 겪는 이해당사자라는 점에서 수치를 액면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직역이기주의의 성격이 있음에도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재응시에 동의했다는 점은 의대생들에 대한 지지가 상당하다는 의미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의 ‘의대생 구제 반대 청원 ' 동의가 60만명에 달했다지만 이 역시 국민 의사의 정확한 대변은 아니다. 반대로 '구제해줘야 한다'는 청원이 걸렸다면 그 역시 적잖은 지지를 모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국가 주관 시험 재응시 허용 전례가 없다는 정부주장도 엄밀하게 보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의사국시만 해도 번복 전례가 있다. 2000년 의약분업사태 때 시험 거부 사태가 벌어졌고, 분쟁 마무리후 정부는 국시 일정을 조정해 의대생들의 시험을 허용했다. 90%를 웃돌던 의사 국시 합격률이 60%대로 크게 떨어진 1995년, 1996년에도 2년 연속으로 재시험을 치러 탈락자 상당수를 구제했다. 더 근본적으로는 사태의 원인과 책임을 짚어봐야 한다. 의대생들의 투쟁은 잘못된 의료정책에 대한 저항 차원이었다. 코로나19가 재확산한 가운데 의료계 이해가 첨예한 △공공의대 설립 △의대정원 400명 증원 △지역의사 3000명 양성 △원격 의료 확대 등을 졸속으로 밀어붙이는 정부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었다.제대로 된 공청회 한번 없었고, 시민단체 추천으로 공공의대생을 모집하는 등의 구상이 알려지자 여론도 파업에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의사와 환자, 의사와 간호사를 편 갈라 여론전을 펼치는 위선적 민낯까지 드러나자 정부가 사실상 백기를 들고 만 게 지난 여름 의료파업 사태의 경과다.
의대생의 투쟁이 한국의료정책의 궤도이탈을 막는 데 기여했건만 지금 와서 "의사고시 응시 허용에 대한 합의는 없었다"며 모르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식의 여당 대응도 어른스럽지 못하다. 합의문의 잉크도 마르지 않았는데 의대생들이 우려한대로 정부 여당은 벌써 원안 재추진을 모색중이다. 의사들의 저항의 싹을 자를 심산인지 의료계 탄압 법안도 봇물이다. 재난 발생 시 의료 인력 강제동원법, 북한에 의료 인력파견하는 남북 보건의료 교류협력법, 대체조제 활성화법 등이다. 의사 면허 취소 조건 완화법과 면허 영구취소법까지 발의됐다.
국가의료시스템을 볼모로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비겁하기 그지없는 행태다. 국가는 국민과 공익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감정에 휩쓸려 의대생을 죄인다루듯 하고 인민재판식으로 사태를 처리하는 것은 국정운영이 아니라 싸구려 정치에 불과하다. 물론 '밥그릇 지키기'의 측면이 있을 것이고 의대생들의 행동이 최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불이익을 감수하고 목소리를 낸 의대생들을 집단이기주의로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과잉이다. 설사 잘못이 있더라도 항복을 요구하기보다 우수한 인재들이 우리 사회의 중추로 성장할수 있도록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의대생의 사과보다 정부의 낮은 자세가 더 시급하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