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기다리며 쓰고, 그리고, 칠했죠"
입력
수정
지면A31
중견화가 김25, 내달 5일까지 한경갤러리서 초대전“늘 그래왔듯이 저는 색에 먼저 심취해요. 울렁임이 잦아들 때까지 붓질하다 보면 미명처럼 떠오르는 형태가 있어요. 도형들은 기묘하거나 불완전하거나 새로운 형태일수록 더 완전합니다. 그것들이 나만의 색면과 하나가 되며 소통하는 순간, 내 몸과 자아가 합일됨을 느끼죠.”
바탕색에 영어, 한자 등 텍스트 겹쳐 써 풍경 표현
바다와 호수 등의 정적과 침묵, 기다림 담은 '어린 왕자' 시리즈'
대형 화면을 즉흥적 붓질로 채운 '신비의 실체'
福, 명심보감 구절 등 겹쳐 쓴 '행운' 연작 등 선봬
김25(본명 김유미·57)는 색면추상을 통한 색의 실험에 몰두해온 중견 여성 작가다. 2010년대에 선보인 ‘인상(Impression)’ 시리즈에서는 색면분할, 구상을 둘러싼 추상 등 다양한 실험작을 소개했다. 근년에는 사진으로 포착한 일상의 이미지를 디지털로 왜곡해 색면을 만들기도 했다.그가 색면추상에서 벗어나 한자, 영어 등의 텍스트로 이미지를 표현한 새로운 작품을 내놨다. 12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1층 한경갤러리에서 시작하는 초대전 ‘어린 왕자를 기다리며(Waiting for Little Prince)’를 통해서다. 바다, 수영장 등 물의 풍경을 텍스트로 표현한 ‘어린 왕자를 기다리며’ 시리즈, 한자 복(福)과 명심보감 구절을 수도 없이 겹쳐 쓴 ‘행운을 연습하다(Practice for Fortune)’ 시리즈, 지난해 선보인 ‘신비의 실체(The Truth of Mystery)’ 시리즈 등 24점을 걸었다.‘어린 왕자’ 연작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작품인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어린 왕자’에 대해 그는 “마음이 불편하거나 누군가가 미워질 때, 못된 마음이 생길 때 읽으면 편해지는 최애서”라고 했다.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모든 지혜가 담겨 있고, 상징과 은유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 이 소설의 구절과 자신의 생각을 써넣으며 바다, 호수, 수영장 같은 물의 풍경을 묘사했다. 일렁이는 파도의 포말, 하늘빛, 물빛, 빛과 그림자 등이 모두 바탕색 위에 무수히 겹쳐 쓴 텍스트다.“작년부터 새로운 회화를 모색하며 여러 가지 재료와 방법을 새롭게 실험하고 있었는데 코로나19가 발생한 뒤 생각이 달라졌어요. 미술이 어려워야 할 이유가 있나 싶었죠. 그때 발견한 게 한자의 조형성이었습니다. 해서체 한자를 쓰고 그 위에 화이트로 덮은 뒤 또 쓰기를 반복한 것이 ‘포천’ 시리즈예요. 그러던 어느날 해질 무렵 차창 밖 풍경이 글씨로 보여서 자연 풍경에 텍스트를 넣고 그리기 시작했죠.”한자의 조형성에서 회화의 요소를 끌어낸 것이 포천 시리즈라면 거기에 의미를 붙이고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한 것이 어린 왕자 시리즈다. 왜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것일까. 동이 트기 전, 미명의 바다는 어둑하고 파도가 일렁이지만 침묵과 정적 속에 잠겨 있다. 김 작가는 “어지러운 세상을 정리해줄 누군가가 오기 전의 기다림”이라고 했다. 좋은 세상을 열어줄 영웅을 어린 왕자로 상징했다는 설명이다.
김허경 미술평론가는 “문자가 모여 이뤄진 덩어리의 이미지는 문자와 세계(우주)를 연결하는 지점에서 생성되는 미지의 메아리”라며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연결되는 지점에서만 비로소 창조되고 읽히는 텍스트”라고 평가했다.함께 내놓은 ‘신비의 실체’ 연작은 김 작가 특유의 즉흥적 붓질로 제작한 작품이다. 100호 크기의 면천 수십 장을 작업실 바닥에 펼쳐놓고 즉흥적인 기운과 숨가쁜 신체의 움직임으로 화면을 채웠다. 커다란 붓으로 수성 아크릴과 바니시(광택제)를 겹쳐 바르기를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유화 및 아크릴 물감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색채들이 생성되는 순간을 그는 ‘신비’라고 불렀다. 화면에서 겹쳐지고, 흘러내리고, 고착되는 과정을 거쳐 스며들고 배어난 색채들은 각기 다른 패턴을 형성했고 오로라처럼 신비로웠다.
여기서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작품을 사각, 원형 등으로 오려내고 분할해 화면을 해체하고 재배치한 것. 하나의 작품이 여럿으로 분화되거나 ‘회화적 설치’로 재탄생했다. 알맹이를 뺀 테두리가 작품의 본체가 되기도 했다.
김 작가는 1990년 첫 전시 이후 30년 동안 써온 본명을 지난해 ‘김25’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변화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커서일까. 그는 “구구단으로 2×5=10이니까 10년마다 괄목할 만한 변화와 발전을 이뤄내겠다는 각오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11월 5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