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양적성장 대신 인류 행복 강조한 정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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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취임사에서 '행복' 7회 언급“인류의 꿈을 함께 실현해 나가는 기업이 돼야 합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지난 14일 취임사에서 한 말이다. 정 회장은 이날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지 않았다. 글로벌 자동차 판매량을 얼마나 늘릴지, 그룹 규모를 어떻게 키울지 등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현대차그룹을 세계 최고의 자동차 그룹으로 키우겠다는 으레 할 법한 말도 없었다.
"한국 기업 달라진 눈높이" 평가
도병욱 산업부 기자 dodo@hankyung.com
대신 인류 행복에 공헌하겠다고 강조했다.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는 ‘인류’(7회) ‘행복’(5회) ‘고객’(9회) ‘미래’(10회) 등의 단어를 여러 차례 썼다. 미래 먹거리를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 회장은 커지는 친환경자동차 시장 공략이 아니라 고객의 평화로운 삶과 건강한 환경을 위해 전기차 개발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자율주행기술을 개발하는 이유로는 ‘인류의 자유로운 이동과 풍요로운 삶’을 꼽았다. 도심항공모빌리티(UAM)를 얘기할 때는 “인류에게 한 차원 높은 삶의 경험을 제공하겠다”고 자신했다.정 회장의 취임사에 대해 경제계에선 “한국 기업의 달라진 눈높이를 보여주는 내용”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해외시장을 공략의 대상으로, 경쟁사를 꺾어야 할 적으로 여겨 온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현대차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해외시장 개척에 매진했고, 추격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나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5대 자동차 제조사로 자리잡은 지금 정 회장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현대차그룹 고위 관계자는 “정 회장은 취임사에서 그동안 생각해 온 경영 철학과 그룹의 미래를 임직원에게 소개하고 싶어 했다”며 “취임사에서 그가 가장 집중한 단어는 ‘인류’였다”고 설명했다.
정 회장의 취임사에는 평소 생각이 많이 반영돼 있다. 그는 약 1년 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류, 행복 등의 키워드를 강조해 왔다. 지난해 11월 미국에서 열린 ‘모빌리티 이노베이터스 포럼’에서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혁신적 모빌리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며 “현대차의 개발 철학은 인간 중심”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0월엔 전 임직원에게 ‘인류를 위한 진보’라는 그룹의 새 비전도 제시했다.
경제계에선 총수의 눈높이가 달라진 만큼 현대차그룹이 나아갈 방향도 어느 정도 바뀔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동안 만들었던 자동차와 인류의 행복을 위한 ‘미래 모빌리티’는 전혀 다를 것이란 이유에서다.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할 새로운 시도에 나서거나 고객을 위해 단기적인 손해를 감수하는 결정을 할 수도 있다. 정 회장은 1994년 현대차그룹에 입사한 뒤 26년간 경영에 참여해 왔다. 이제 가장 앞서 걸어가야 할 리더가 된 만큼 그가 꿈꾸는 미래를 현실로 만들어야 하는 무거운 책임도 짊어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