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의 심장 멈추게 한 김재규…그는 혁명가인가, 반역자인가?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김재규 장군 평전' 출간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2분경 청와대 옆 궁정동의 중앙정보부 밀실. 박정희 대통령은 소위 '안가(安家)'로 불리는 이곳 만찬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을 맞고 맥없이 쓰러졌다. 이로써 18년 5개월 10일 동안의 1인 군사독재와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다.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각각 2발씩 쏘아 두 사람을 절명시켰다.

그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며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훗날 법정에서 증언했다. 이듬해 5월 24일, 그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0·26 거사를 실행한 부하들과 함께 사형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당시는 광주학살이 한창 자행되고 있을 때였다.
올해로 '10·26 거사'가 일어난 지 41년, 유신의 심장을 멈추게 한 '주범'이 처형된 지 40년째를 맞았다. 김삼웅(신흥무관학교 공동대표) 전 독립기념관장은 김재규의 일대기 '김재규 장군 평전'을 펴내 그의 삶과 그날의 진실을 톺아본다.

김재규(1926~1980)는 과연 혁명가인가, 아니면 반역자인가?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이 사건과 김재규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여전히 크게 엇갈린다.

한쪽에서는 김재규를 '박 대통령 시해범(弑害犯)' 또는 '반역자'라 부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독재자를 처단한 의인(義人)'이라 부른다. 이에 대해 저자는 "군사독재에 저항한 민주화 투쟁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막상 유신의 심장을 멈추게 한 주역에 대해선 평가를 '건너뛰었다'"며 "이는 '국가원수 살해'라는 도덕적 감성주의와 함께 유신세력과 족벌언론의 세뇌 탓"이라고 주장한다.

독립운동사와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인 저자는 단순히 '10·26사건'이 아니라 '김재규'라는 인물과 그의 생애에 초점을 맞춰 폭넓고 깊이 있게 기술해나간다.

삶 전체를 조명하면서 권력의 과정에서 그가 저지른 과오와 더불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력도 하나하나 추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김재규는 유신쿠데타를 대한민국의 기본가치를 뒤엎은 반역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이승만 대통령이 짓밟은 민주공화제를 4·19 혁명으로 바로잡았는데, 박정희가 5·16 쿠데타에 이어 유신쿠데타로 주권재민과 삼권분립의 기본가치조차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김재규는 '애국심이 집권욕에 못 미치고' 있는 박정희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쳐 박정희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계획을 세웠으나 모두 실패로 끝난다.

먼저, 3군단장 시절에 유신을 감행한 박정희가 군부대 시찰을 나왔을 때 그를 부대에 가두고 하야시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막상 박 대통령이 군단을 방문하자 그 결심이 사그라지면서 유야무야되고 만다.

이어 1974년에 건설부장관 발령장을 받는 자리에서 박정희를 쏘고 자신도 자결해 유신독재체제를 무너뜨리려 했다.

이때 국민과 가족에게 전할 유서 5통까지 준비할 정도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러나 이 계획 역시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두 번의 계획이 중도무산됐으나 민심이 정권을 향해 들끓던 1979년 10월 26일, 더이상 거사를 미루지 않고 실행에 옮겨 유신독재 종식으로 역사를 일거에 반전시킨다.

저자는 김재규의 생애도 찬찬히 들여다본다.

고집 센 아이였던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게 되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일본 학생과 싸운 일로 학교를 그만두고 2년여 만에 귀국한다.

중등교육기관인 안동농림학교(5년제)에 입학한 그는 4학년에 올라갈 때 일본군에 입대한다.

일제의 가미카제 특공대 훈련부대에서 훈련을 받던 중,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다.

결혼 후 경북사대 중등교원양성소를 나와 교사로 일했으나 결혼 생활도, 교사 근무도 싫어했던 그는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를 도피처로 택한다.

동기생(제2기)으로 박정희를 만난 곳이 바로 이 학교였다.

이후 1973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약 25년 동안 파란만장한 군대 생활을 이어나갔다.
저자는 "우리는 김재규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그가 있어 철옹성과 같은 유신체제를 한순간에 허물었다"며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밝히는 것이 필자가 추구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지점"이라고 말한다.

"10·26 거사로 독재자가 사라진 뒤 그의 후예들은 수백억 원의 국비와 도비 등으로 기념관과 생가를 호화롭게 짓거나 복원하며 그를 기리고 있다.

우상화를 넘어 신격화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러나 김재규는 1992년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삼성공원묘지 한쪽에 있는 묘 앞에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가 세워지고, 2019년 5월 국방부의 훈련개정에 따라 역대 지휘관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고, 그가 복무했던 육군부대에 겨우 사진이 게시되는 정도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되고, 정의란 무엇인가를 거듭 생각하게 한다.

이제 40년 세월의 풍상이 지났으면 유신독재의 심장을 멈추게 한 사건과 그 사건의 주인공에 대해 공정하게 시비곡직을 가릴 때가 됐다.

"
마지막으로 김재규의 최후 일성을 들어보자. "3심 재판에서는 졌지만 4심인 역사의 법정에서는 이길 것"이라는 말을 남긴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목숨을 구하는 데 급급해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요번에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기 위한, 민주주의라고 하는 나무의 거름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시간이 된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고 또 보람으로 생각하고 또 매우 즐겁습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발전과 10·26 민주회복 혁명, 이 정신이 영원히 빛날 것을 저는 믿고 또 빌면서 갑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오."
두레. 304쪽. 1만8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