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고수 열전] "투자는 착한 기업에, 회수는 순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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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창석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사장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의 바이오 기업 투자를 총괄하는 황창석 사장에게 ‘투자 철학’에 대해 물었다. 한참 대답을 아끼던 그는 “착한 기업에 투자한다”라고 말했다.
투자업계에 24년을 몸담은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황창석 사장은 국내 최고 베테랑 벤처캐피털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에서 바이오 기업 투자를 담당하는 바이오딜팀의 구성원은 그를 포함해 4명이다. 황 사장은 4명 모두가 ‘만장일치’해야 투자를 집행하는 독특한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착한 기업에 투자한다’거나 ‘사람을 보고 투자한다’는 투자원칙은 어쩌면 뻔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래선지 황 사장은 이 대답을 꺼내놓기까지 꽤나 뜸을 들였다. 자칫 나이브(naive)하게 들릴 수 있어 투자자들에게 눈치가 보일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투자업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다 보니 허투루 내뱉은 말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초기 벤처기업이 투자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초기 데이터가 전부인데 이걸 보고 평가절하하는 건 벤처캐피털리스트가 할 일이 아니다”라며 “결국 벤처캐피털리스트는 기업의 잠재능력을 봐야 하기 때문에 기업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대표이사의 됨됨이, 이 기업이 하고자 하는 일의 가치에 집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바이오 기업 최대 리스크는 ‘오너 리스크’황 사장의 인터뷰 자리에 배석한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의 곽상훈 상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LG생명과학(현 LG화학 생명공학사업본부) 출신으로 2016년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바이오딜팀에 합류했다. 곽 상무는 “LG생명과학에서 일할 땐 어떤 신약 파이프라인(신약 후보물질)을 가져올지 말지를 판단하면서 주로 거의 완성된 후반 데이터를 많이 봤는데 이곳에 온 뒤로 바이오 기업의 수준 낮은 데이터를 다뤄야 해서 깜짝 놀랐다”며 “데이터만으론(사업화)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수 없어 결국 대표이사가 어떤 사람인지를 눈여겨보게 됐다”고 말했다.
바이오 기업들이 제시하는 데이터 상당수가 약물의 효능이나 안전성 등을 잘 보여주는 수준의 체계적인 데이터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는 또 “필요하면 투자하기 전에 추가 실험을 요구하는 등 약물 데이터를 다각적으로 확인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벤처기업의 성패는 8할이 대표이사에게 달려 있다”고도 했다. 기업공개(IPO) 또는 인수합병(M&A) 등으로 투자금을 회수하기 전까지 발생할 수 있는 ‘오너 리스크’가 벤처기업에선 가장 주의해야 할 위험요소라는 뜻이기도 하다.
황 사장은 “정부가 바이오 기업을 포함한 벤처기업을 위한 정책을 매번 강조하는 건 고용 측면도 있지만 여기 기업들에서 나온 기술이 질병을 고치고 또 진단할 수 있게 해준다”며 “바이오 기업에 투자하는 걸 우린 사회적 책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VC가 투자하는 기업, 투자 안 하는 기업
바이오딜팀이 투자한 포트폴리오 중에서 손실을 낸 것은 거의 없다. 리스크가 큰 바이오 벤처 투자로는 이례적인 성과다. 황 사장이 꼽는 비결 중 하나는 ‘모멘텀과 펀더멘털의 구분’이다. 여기서 모멘텀이란 해당 분야(섹터)가 호황일 때 투자하는 것이고, 펀더멘털은 기업 자체의 잠재력을 보고 투자하는 것이다. 황 사장은 “뜨는 업종을 좇아 편승하기보다는 성장 가능성이 우수한 회사에 투자하는 걸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만장일치 방식의 투자 결정도 비결이다. 그만큼 보수적으로 투자할 여지도 있지만 치열한 검증 작업을 거치는 구조 때문이다. 바이오딜팀은 각자의 전문영역을 맡고 있지만 투자를 결정할 때는 다른 심사역 모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황 사장은 바이오 영역 전반을 총괄하며, 곽 상무는 화학 신약과 저분자 물질, 항체 등을 맡았다. 바이오 벤처기업 올릭스 창업 멤버인 장찬일 이사는 간섭RNA(RNA i), 백성현 팀장은 약물전달시스템(DDS) 담당이다.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가 투자하지 않는 기업은 어떤 곳인지도 귀띔해줬다. 황 사장은 “신약 개발업체의 경우 데이터에 기복이 너무 심하거나 작용기전(MoA)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면 투자 결정을 쉽게 내리지 않는 편”이라며 “진단업체는 보유 기술의 상업화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되면 투자하지 않는다”고 했다.
곽 상무는 “자기 기술에 대한 과도한 확신은 약(藥)이 되기도, 독(毒)이 되기도 한다”며 “학계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는지 여부를 함께 고려한다”고 덧붙였다.좋은 대표가 있는 착한 기업에 투자
이런 기준 때문에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의 포트폴리오 중에는 인력과 기술력, 네트워크를 중시해 투자한 기업이 많다.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가 대표적이다. 황 사장은 이 회사가 설립된 지 1년 만인 2006년에 투자를 결정했다.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라는 회사가 시장에 잘 알려지지 않던 때다. 그럼에도 사람과 기술력이 돋보이는 회사였다. 황 사장은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를 설립한 김용주 대표는 1991년 LG생명과학에서 국내 1호 신약 팩티브를 개발한 주역”이라며 “투자할 만한 매력이 충분한 바이오 기업이었다”고 설명했다.
‘착한 기업’에 투자한다는 철칙도 꾸준히 지켜오고 있다. 2010년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가 투자한 팬젠은 한국과 말레이시아에 판매하는 빈혈 치료제(바이오시밀러)를 개발해 제조하는 회사다. 황 사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이 회사에 투자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는 이 회사에 50억 원을 투자해 226억 원(352.8%)을 회수했다.
마이크로바이옴(장내미생물)을 이용한 신약을 개발하는 고바이오랩 또한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가 최근 투자한 포트폴리오 회사 중 한 곳이다. 곽 상무는 “똑같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쌍둥이라도 성장과정 중 차이가 생기고 때론 한쪽만 병이 들거나 하는데, 여기에 마이크로바이옴의 역할이 크다”며 “이 회사의 사회적 가치에 초점을 두고 투자를 집행했다”고 말했다.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는 이 회사의 시리즈 A와 B투자유치에 참여해 90억 원을 투자했다. 고바이오랩은 지난 9월 17일 한국거래소 코스닥시장본부에서 상장승인을 받아 오는 11월 중 코스닥에서 주식거래를 시작할 예정이다.
내친김에 회수 시점도 물었다. 곽 상무는 “IPO 후 보호예수기간이 끝나더라도 곧장 보유 지분 전량을 매도하는 일은 적은 편”이라며 “보통 장세에 맡기는 편이고 상황에 따라선 보호예수기간이 끝나고도 오랫동안 지분을 보유한다”고 설명했다.
황 사장은 ‘순리’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기다리는 투자를 해야 한다”며 “바이오 기술은 시장에 나오기까지 오래 걸리는 게 당연한 일인데 이걸 기다리지 못하면 좋은 벤처캐피털이 아니다”고 말했다.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가 운용 중인 자산 규모(AUM)는 9월 현재 7587억 원이며 이 중 바이오 기업 투자 비중은 29%다. 현재 펀드레이징을 진행 중이며 10월 말 1차 납입을 마치면 전체 AUM이 1조 원을 넘길 전망이다.앞으로의 바이오 투자 트렌드는?
황 사장은 현재의 투자 트렌드가 큰 변동사항이 없으면 한동안 유지될 것으로 내다봤다. 항암제와 면역치료제, 혈뇌장벽(BBB)을 뚫고 뇌로 갈 수 있는 중추신경치료제 등이 한동안 대세가 될 거란 전망이다. 곽 상무는 “유전자 치료제, 짧은 간섭 RNA(siRNA) 치료제, 줄기세포치료제 등도 투자업계로부터 큰 관심을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황 사장은 다른 산업에서는 보기 힘든 바이오업계만의 특징을 꼽기도 했다. 이른바 ‘거대 기업’이 없다는 것이다. 신기술이 나올 때마다 한발 앞서 치고 나가며 잠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기업은 종종 있지만 정보기술(IT)이나 제조업에서처럼 거대 기업이 된 곳이 적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투자한 기업이 세계적인 신약을 만들거나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진단플랫폼을 내놓게 되는 날을 기다리며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이우상 기자 i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