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자료 444개 삭제하고도 '적극행정 면책' 신청한 공무원

현장에서

증거 인멸하고 책임은 없다?
감사원 처분前 '황당한 요구'

강영연 정치부 기자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 감사 과정에서 자료 444개를 삭제한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과 이를 지시한 담당 국장은 감사원 처분 결정이 내리기 전 감사원에 적극행정 면책을 신청했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적극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문제라는 주장이다. 면책제도의 근본 취지를 망각한 황당한 신청이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감사원에 따르면 산업부 공무원 A서기관은 2019년 11월 초 감사원이 ‘월성 1호기 조기폐쇄’와 관련해 감사를 시행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즉시 전 상관이었던 B국장에게 연락했고 B국장은 A서기관에게 관련 자료 삭제를 지시했다. A서기관은 감사 하루 전이자 일요일인 12월 1일 밤 사무실로 출근해 자료를 삭제했다. 2시간이 안 되는 동안 삭제한 서류는 444개에 달했다. 심지어 포렌식 등으로도 파일을 복구할 수 없도록 파일 내용과 제목을 수정, 저장한 뒤 삭제했다. 월성 1호기 조기폐쇄 관련 청와대 보고 서류 등 민감한 자료들이었다.이 같은 감사 방해는 상사가 지시하고 부하 직원이 수행한 조직적이고 악질적인 증거 훼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감사원은 이들의 면책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사원은 “신청내용이 면책요건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적극행정면책자문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면책을 불인정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적극행정 면책제도는 공직자들의 적극적인 업무 수행 중 불가피하게 발생한 잘못에는 책임을 묻지 않기 위해 도입됐다. 이는 국가 또는 공공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거나 그 업무를 추진해야 할 필요성과 타당성이 인정되는 경우 등으로 제한된다. 감사를 방해한 비리 공무원을 감싸는 데 악용돼선 안 된다.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극단적이지만 근본적이지 않은 ‘악의 평범성’을 강조했다. 유대인을 학살한 아이히만처럼 나쁜 행위를 저질렀지만 행위의 동기는 평범할 수 있다는 게 아렌트의 결론이다. 그 동기는 상사의 지시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이었다. 악이 평범한 이유는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아렌트는 강조했다. 조직논리에 따라 자신의 말과 생각을 잃어버린 공무원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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