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 찬양? 제대로 '먹튀'"…K팝 외국인 멤버의 딜레마 [연계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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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연계소문]
연(예)계 소문과 이슈 집중 분석
항미원조 찬양한 K팝 그룹 中 멤버들
"한국 활동 제재하라" 청원까지 등장
해외 활동 주 동력되는 외국인 멤버들
정치·역사 이슈엔 늘 발목 잡혀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뜨겁게 달군 글이다. 한국에서 아이돌 그룹 멤버로 데뷔해 막대한 인기를 축적한 일부 중국인 연예인들이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운)'를 찬양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네티즌들은 이들의 한국 활동을 막아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미국과 갈등을 겪고 있는 중국은 올해 한국전쟁 참전 70주년을 맞아 '항미원조'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항미원조 사상을 토대로 한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대거 쏟아내는가 하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의 6·25전쟁 참전 의미를 "제국주의의 침략 확대를 억제한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역사왜곡 동조하는 중국인 연예인들의 한국 활동 제재를 요청합니다."
"중국어·일본어 무대 기획하고 내보낸 방송사들과 연예기획사들 규탄해주세요."
그 가운데 중국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는 K팝의 머리채까지 잡았다. 방탄소년단이 한·미관계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밴플리트상을 받은 후 전한 수상 소감을 문제 삼은 것. RM은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으로 우리는 양국이 함께 겪은 고난의 역사와 많은 남성, 여성의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중국은 RM의 발언이 6·25 당시 중국군의 희생을 무시한 것이라고 억지 주장을 했다. 이후 중국 내 물류업체들이 방탄소년단 관련 제품 배송을 중단하겠다고 밝혀 논란에 기름을 붓기도 했다.
미중 갈등이 고조된 가운데 K팝의 등이 터지는 황당한 상황. 그리고 이 미묘한 분위기를 갈등으로 부추긴 건 다름 아닌 한국에서 활동했던 중국인 연예인들이었다. 그룹 엑소 레이는 최근 자신의 웨이보에 "영웅은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는 글과 함께 '지원군의 항미원조 출국 작전 70주년 기념'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에프엑스 빅토리아 역시 "역사를 기억하고 평화를 귀하게 여기며 영웅에게 경의를 표한다"면서 같은 해시태그를 덧붙였다. 프리스틴 주결경, 우주소녀 성소·미기·선의 역시 이러한 게시글을 올렸다.'항미원조' 찬양의 역풍은 거셌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북한과 손을 잡고 남한을 공격했던 일을 모른 척하고 본인들이 남한을 공격했던 이유를 '미국의 제국주의에서 한국을 구하기 위해'라고 뻔뻔하게 우기고 있다. 한국에서 데뷔해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쌓은 중국인 연예인들이 SNS를 통해 선동에 힘을 싣고 있다"며 이들의 활동을 제재해달라는 글이 올라왔다. 한국 엔터테인먼트사 소속으로 돈과 명예를 얻은 이들이 역사 왜곡에 동조한 후에 다시금 한국에서 활동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중국인 멤버들이 K팝 팀으로서 인기를 얻은 후 자국으로 돌아가 개인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먹튀'라는 비판까지 따르고 있다. 한류 영역에서 중국과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항미원조 사상을 찬양한 것이기에 더 이상의 이미지 회복은 불가하다는 시각이 많다.
곤란해진 건 연예기획사들이다. 내수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타깃을 아시아는 물론, 미국·유럽 등지로 넓힌 이들은 역사 관련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노심초사다. 글로벌 그룹을 지향하면서 팀 내 외국인 멤버가 필수 요소처럼 자리잡은 탓이다. 앞서 한일관계가 경색되면서 불매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을 당시에도 엔터사들은 전전긍긍했다.그럼에도 외국인 멤버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가장 빠르고 쉽게 현지화 전략을 성공시킬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태국 출신인 갓세븐 뱀뱀, 블랙핑크 리사는 현지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일본인 멤버가 있는 트와이스와 아이즈원은 일본에서의 앨범 판매량이 상당히 높다. 최근에는 신인 그룹인 시크릿넘버 디타가 인도네시아 출신으로 현지 팬들의 열성적인 지지를 얻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역사전쟁에 낀 K팝은 난감하기만 하다.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다국적 그룹 NCT U는 음악방송에서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가 섞인 곡으로 무대를 했다가 국민청원 대상이 되고 말았다. 청원자는 "공영방송이라는 KBS와 지상파 SBS에서 중국어, 일본어가 송출되는 기막힌 상황이 펼쳐졌다"며 "해방한지 100년도 안 된 대한민국 공영방송, 지상파에서 버젓이 중국어와 일본어가 들린다는 현실이 정말 원통하다"고 했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중국 출신 연예인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고, 데뷔를 앞둔 신인 그룹에도 중국인 멤버가 포함돼 있다. '큰 손'인 중국 소비 시장을 무시할 수 없는 탓이다. 해외에서의 인지도 향상에 상당한 도움이 되지만, 정치·역사적 이슈에 가장 크게 좌지우지되니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특히 한한령 해제를 기대했던 업계는 이번 사태로 다시금 중국과의 관계가 얼어붙을까 긴장하고 있다. 한 연예계 관계자는 "코로나19로 해외 활동이 전무한 상황이라 근심이 큰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한류에도 지장이 생길까 우려된다"며 "무엇보다 다국적 팀들은 이러한 역사적 논란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만은 없어 더욱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전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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