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최약국' 조선…붕괴될 수밖에 없던 6가지 이유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56) 조선을 붕괴시킨 성리학적 체제의 구조적 특성

성리학자, 절대적 권력집단으로 변질
신분제 고착화·차별정책 공고
농업 위주 정책 강행…공·상업 천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지방교육기관인 파주향교의 전경. 파주시 소재.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1592년 음력 4월 13일 황혼이 깃들 무렵, 700척에 탄 일본의 병력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征明假道)'란 명분을 내걸고 20여만 명의 대군을 파견했다. 4일째 아침나절에야 상륙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은 병력을 파견했지만 신식무기로 무장한 왜군은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을 함락했다.그사이 도망간 정부와 군대 대신 의병들이 전국에서 항전했고,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연승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를 이뤘다. 이어 정유재란을 거쳐 7년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은 막을 내렸다.

국제정세를 보면 알 수 있었고, 일본이 명나라와 조선을 공격한다는 정보들이 유구국을 통해서도 알려졌었다. 심지어 간첩으로 활동했고, 훗날 향도 역할을 한 승려인 겐소는 일본이 침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기이하고 무능한 정부는 갑론을박 끝에 서인인 황윤길과 동인인 김성일을 정사와 부사로 일본에 파견해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공격 가능성을 놓고 정치적으로 반대파인 두 사람의 의견은 정반대였다.

불가사의 한 일이다. 존재 의미를 물을 수밖에 없는 정부와 군대, 관리, 지식인들, 그리고 백성들이었다.

왜 조선은 국방을 무시해서 생존을 위협받았을까? 조선과 국민은 어째서 항상 가난했을까?

조선 사회의 붕괴에는 현실적인 상황의 변화도 작용했지만, 국체와 정체 등의 근본적인 성격이 연관된 것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은 헌법의 전문과 1조 1, 2항에 국체, 정체를 선언했다.조선의 정체성은 주도세력인 정도전이 1394년에 태조에게 바친 조선경국전에 국가의 목표, 정책의 대강과 방법론 등이 담겨 있다. 여기서 ‘국민(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왕(人君)을 버린다’라고 적어 ‘백성의 중시’를 정체의 핵심으로 선언했다. 또한 왕권마저 제약하는 정치 엘리트들로 관료 체제를 구축하고, 성리학 사상으로 이상사회를 실현코자 했다.

이 주장을 계승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라 조선은 끝까지 성리학의 정치사상, 경제사상, 사회사상을 추구하고, 신권이 강한 체제를 고수했다. 하지만 관념적이고, 원론적인 선언과 이상적인 정책과 정강들은 국내·외의 상황 변화와 주체자들의 교체에 따라 빠르게 변질했다.

첫째, 성리학자들은 절대적인 권력집단으로 변신했다. 과거를 통과의례로 삼은 그들은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학자이며, 이를 실현하는 관료이다. 거의 유일한 생산수단이며 재화인 토지의 소유자들이며, 극소수의 공·상업 운영자들인 양반이었다. 또한 불교를 대체한 유교를 관리했고, 시(詩)·서(書)·화(畵)를 창작하는 문화인이었으며,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사 역할을 맡았다. 심지어는 왕권조차 제약하고, 사적인 법의 집행도 가능한 막강한 사회권력을 소유한 절대적인 존재였다. 둘째, 신분제가 고착화되고, 차별정책이 철저해졌다. 혈통을 중심으로 양반·중인·상민·천민의 4단계로 구분되고, 신분 간에는 이동과 전환이 불가능한 체제로 굳어졌다. 역관, 승려들, 내시, 평민들, 하급군인 등도 출세가 가능했던 고려보다 오히려 퇴행했다. 또한 신분을 사(士)·농(農)·공(工)·상(商)·어업 등 직업과 연결해 경제적 차별까지 제도화했다.

선비는 정통론과 명분론으로 장자 상속제와 적서차별, 남녀 차별 등의 사회체제를 만들었고, 심지어는 이를 왕권과 겨루는 권력쟁탈전에도 악용했다. 결국 조선은 양반을 정점에 둔 견고한 서열사회, 계급사회로 전환됐다.
우계 성혼 묘소.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셋째, 농업 위주의 정책을 강행했다. 벼농사는 식량을 제공하는 근간산업이며, 낮은 산들과 들판, 길고 느린 강물이 발달한 자연환경에 적합한 산업이었다. 또한 조세를 징수하고 백성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데 편리했다. 조선은 농민들을 법령으로 토지에 묶어두면서 실질적으로 주거 이전의 자유를 빼앗았다.

반면 공업과 상업, 어업, 무역은 억압하고 천시했다. 산업은 경제적인 부를 창출하고 확장할 수 있으므로 사회의 가치관과 신분제 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특정한 기술력을 갖추고, 정보를 공유하고 부유한 데다가 실용적이고 역동적인 세계관을 갖춘 전문가 집단은 중앙의 통제가 어렵다. 따라서 성리학자들은 산업의 발달을 체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위험 요소로 간주했다. 그 결과, 산업과 경제활동은 정체 상태에 머물렀거나 후퇴해 국가의 부는 증가할 수 없었다.

넷째. 쇄국정책을 더욱더 강화했으며, 멸망 때까지 고수했다. 건국 초기부터 표방한 ‘사대교린’은 중국에 사대하고, 일본과 교류한다는 방침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쇄국정책이었다. 명나라는 왜구의 발호와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 성리학의 영향 등으로 해금정책을 추진했고, 일본은 쇄국이라는 기조 속에 부분적인 개항을 허용하고, 왜구의 존재도 묵인하는 정책이었다.

반면에 조선은 완벽한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국제적인 환경과 명나라의 영향도 있었으나 내부적인 이유로 개방정책을 취하거나 여러 나라와 외교와 무역을 할 의도가 없었다. 개방을 허용하면 다른 체제의 존재와 성격을 확인할 수 있고, 새로운 지식과 사상을 수용하고 경험할 수 있다. 그러면 서열 체제 속에서 누리는 양반들의 특권과 조선사회의 근간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인해 신문물과 기술의 수용이 부족했고, 국제관계를 파악하는 능력과 외교술이 미숙했으므로 국방 등 주변국과 관계된 사업을 등한시했다. 결과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참혹한 결과였다.

다섯째, 외세에 의존하는 성격과 체제가 더 강해졌다. 건국하는 과정에서 국호를 선택하는데 명나라의 허락을 구했고, 명나라의 연호를 수용했다. 이후 정치적인 선택과 외교 관계의 기본 성격을 결정하는데도 명나라의 간섭과 영향을 받았다. 외세 의존적인 정권은 상실된 자주성을 감추거나 왜곡시킬 의도로 내부를 더 억압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내부에서 정통성이 허약하고, 정치적인 도전이 심각할 때는 외세에 더욱 의존한다. 조선은 세종대왕 이후에 사대성이 심해져 명나라의 간섭과 조공품의 양이 늘어나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사료에 나타나듯 산업의 발달이 위축돼서 경제적으로 곤궁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모화사상에 빠져 사회 전체가 자율성과 활력이 약해졌고, 문화는 사변적이고 창조성이 떨어졌다.
율곡이 앞날을 예견하고 지었다는 화석정. 선조가 피난갈때 이 정자를 태워서 그 불빛으로 한밤 임진강나루를 무사히 건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사진=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여섯째, 양반들의 문화와 예술의 독점 현상이 두드러졌다. 전국에 설치한 향교와 서원 등을 네트워크화해 유교를 종교와 사회윤리로서 교육했다. 동시에 전통신앙과 불교, 습속 등을 억압했다. 뿐만 아니라 송나라와 명나라의 문화를 모방한 ‘시(詩)’ ‘서(書)’ ‘화(畵)’란 장르를 창작하고 누리는 등 예술을 독점했다. 반면 실생활에 기초한 문화와 평민들이 참여한 놀이와 예술은 천시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화와 예술은 관념적이고, 자의식이 약하고, 계급적이었다. 18세기 중반이 넘어서면서 정선 등 화가들이 진경산수화를 그리고, 김홍도 등 풍속화가들이 등장했으나 탈춤, 연희, 농악 등 일반인들의 예술과 놀이는 천시됐다.

초기 개혁세력의 이상과 실천 의지는 이렇게 몇 가지 성격으로 변질되면서 조선은 구조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바다 건너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병력을 동원하면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조선의 보수와 진보는 권력과 경제권의 장악을 놓고 피를 흘리는 당쟁에 여념이 없었다. 사대사화를 겪고, 다시 성리학을 표방하고 ‘이기론쟁’을 펼치면서 동서로 나뉘어 또 다른 권력투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상과 원론, 사상은 중요하지만 결국은 운용하는 사람과 세력,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크게 영향받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교조적인 논리와 열정적인 이상론자들보다는 차라리 실용적인 사상과 적응력이 뛰어난 현실적인 인물들이 오류를 범할 확률이 낮다.역사를 공부하면서, 특히 현재 한국 상황을 관찰하면서 이런 생각들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