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택배 대책에 어른거리는 '주52시간 데자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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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감소 대책 없이 "작업 줄여라"“택배산업 성장 속에서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했던 택배기사분들의 안전과 건강, 일자리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관계부처가 지혜를 모아 마련한 방안입니다.”
졸속 정책 부작용 되풀이 우려
백승현 경제부 기자 argos@hankyung.com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을 발표한 지난 12일 밤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일부다. 이 장관은 “오늘 주문하면 내일 받아볼 수 있는 편리한 택배서비스를 위해 애쓰는 택배기사들의 장시간·고강도 노동을 개선하기 위해 작업시간과 심야배송을 제한하고 산재보험 적용제외 사유를 축소하겠다”며 이같이 썼다.그로부터 24시간 후, 장문의 편지에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자신을 ‘경남 양산에서 16년째 근무하는 택배기사’라고 밝힌 A씨가 쓴 글이다. A씨는 “택배기사 대부분이 어려운 시절을 벗어나는 탈출구로 선택한 직업인데, 근무 조건만 좋아지고 수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정부 대책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노동자가 존중받아야 하고 더 이상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기에 해야만 하는 당연한 조치들이 현직(현장)에서는 덜컥 겁이 난다”며 “이제 겨우 먹고살 만한데…”라고 했다.
A씨는 작업시간·심야배송 제한, 산재·고용보험 의무가입 등 정부 대책에 대한 현장 택배기사들의 의견도 전했다. “나는 6시면 일 끝나는데 구역 줄어드나?” “산재·고용보험료 다 내면 의료보험·국민연금도 올라가나?” “이제 택배하면 일정 금액 이상은 못 버는 거야?” 등이다.
이른바 ‘노동계’의 요구로 급류를 탄 택배 대책 논의 과정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택배연대노조라 불리는 이들이 누구를 대표하는지 모르겠지만 택배기사는 아닌 듯하다”고 지적했다.A씨의 글은 이번 정부 대책이 노동계의 주문에 못 이겨 내놓은 면피성 대책이라는 비판과 맥락을 같이한다. 정부는 심야배송·작업시간을 제한하겠다면서도 이와 직결되는 택배기사들의 소득 감소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주 5일제를 확산하겠다면서 서브-허브터미널을 연결하는 화물기사와 상·하차 인력의 생계에 대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소비자 부담을 수반하는 택배비 인상 문제는 추후 사회적 대화로 넘겼다.
일각에서는 노동계 요구에 등 떠밀려 추진되는 택배 대책 논의가 주 52시간제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장시간 근로를 막겠다며 전격 도입한 주 52시간제는 취지와 달리 결과적으로 대기업 근로자들만 혜택을 받고 정작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중소기업 근로자와 600만 자영업자는 더 힘들게 만들었다.
이 장관은 A씨의 댓글에 “어떤 의미인지 잘 알겠다. 조금 더 고민하겠다”고 답변했다. “계층을 이동하는 사다리는 기대도 안 한다. 다만 열심히 일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는 기사들의 바람을 꺾지는 말아달라”는 호소에 이 장관이 어떤 고민의 결과를 내놓을지 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