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평범한 약사는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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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독일계 루마니아인 빅토르 카페시우스는 약사이자 제약회사 바이엘의 영업사원이었다. 그는 고객들에게 호감을 얻어 ‘약사 삼촌’이라고 불리고 이웃 유대인들과 어울려 지내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는 나치의 핵심 군사조직인 SS 친위대에 소속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만행을 저지르는 핵심 인물 중 한 명이 됐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기차역에서 내리는 이웃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 임신부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보조하기도 했다. 희생자의 시체에서 채취한 금니를 빼돌리기까지 했다. 손쉬운 대량학살을 가능하게 한 독가스 ‘치클론 B’를 관리하고 공급하는 수문장이기도 했다.
퍼트리샤 포츠너 지음
김지연 옮김 / 북트리거
388쪽│1만7000원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는 카페시우스라는 인물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악의 중심 속에서 타락하는지 고발한다. 유대인인 저자는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인물과 역사를 파헤치는 저서를 지속해서 써왔다.카페시우스는 여러모로 아우슈비츠에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출생도 아니었고 다른 나치 군인들 같은 민족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강제 징집을 통해서 군대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이후에는 여느 평범한 직장인처럼 조직의 성장과 개인적 이익을 위해 일했다. 생체실험에 적당한 수감자들과 가스실로 보낼 수감자들을 선별했다. 의약품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신입 수감자들의 소지품에서 귀중품만을 열심히 수집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전범재판소에 서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곧 풀려나서 10여 년간 조용하게 살았다. 살인죄 공소시효 20년이 지나기 직전인 1963년 아우슈비츠 재판이 다시 열려 살인방조죄로 8년형을 받았다. 법원은 그가 루마니아 출신 동료 시민 최소 8000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저자는 개인뿐만 아니라 파르벤이라는 거대 화학회사가 아우슈비츠 건설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수용소 확장에 직접 나섰다고 지적한다. 파르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14년 동안 노벨 화학상과 의학상을 4개나 수상했다. 모르핀, 아스피린 같은 혁명에 가까운 약을 제조했다. 이 회사는 바이엘, 바스프, 아그파와 같은 대표 독일 기업으로 분할된다. 인간에게 가장 이로운 약을 만들던 기업도 나치의 손을 잡고 악의 축으로 변신했다. 이해관계 속에서 쉽게 타락하는 ‘악의 평범성’은 인간이나 기업이나 예외가 없다고 저자는 전한다.
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