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빅딜에 눈물 흘렸던 LG…반도체 인연, 이대로 끝일까[황정수의 반도체 이슈 짚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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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LG반도체, 빅딜로 강제 매각구광모 LG 회장과 삼촌 구본준 고문 간 계열 분리가 시동을 걸었다. (주)LG는 지난 26일 LG상사 LG하우시스 LG MMA 실리콘웍스 등 4개 계열사를 분할해 '(주)LG신설지주'(가칭)를 설립하는 계획을 의결했다. 신설지주 대표이사는 구 고문이 맡는다. 내년 5월께 구 고문의 계열 분리가 완료될 것으로 전망된다.
2014년 인수한 실리콘웍스는 계열분리
스마트폰용으로 개발한 AP도 큰 호응 못 얻어
가전, TV용 AI칩은 꾸준히 개발
반도체기업 M&A 가능성도 열려 있어
계열분리안이 확정되기 전 관심사 중 하나는 실리콘웍스의 운명이었다. LG그룹에서 유일하게 남은 '반도체 계열사'란 상징성 때문이다. LG는 2014년 5월 실리콘웍스 지분 약 19%를 652억원에 인수했다. 현재 (주)LG 지분율은 33.08%다.실리콘웍스는 디스플레이구동칩(DDI) 설계와 판매를 주력사업으로 하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다. DDI는 TV 등 디스플레이에서 빨간색, 녹색, 파란색을 표시하는 서브픽셀을 제어하는 TFT(박막트랜지스터)에 신호를 전달하는 반도체다. 쉽게 말해 영상 정보를 화면에 표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1~3분기 누적 매출 7989억원, 영업이익은 695억원을 기록 중인 '알짜 기업'이다. 물론 주요 고객은 계열사 LG디스플레이지만 중국 BOE 등에 납품하며 매출처 다변화에 주력하고 있다. 실리콘웍스는 세계 DDI 시장에선 세계 3위, 전 세계 팹리스 중에선 60위권에 드는 기업이다. LG에선 실리콘웍스가 구 고문 품에 안기게 된 것에 대해 '아쉽다'는 반응이 나온다.
실리콘웍스가 계열분리되면서 현 상황에서 LG의 반도체사업은 막을 내리게됐다. 물론 LG전자 안에 아직까지 반도체 개발·설계를 담당하는 조직이 있지만 반도체를 전문으로 하는 계열사는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간 LG그룹의 행보를 보면 반도체 사업에 욕심을 안 낸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LG와 반도체사업은 인연이 닿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온다. LG와 반도체사업의 역사를 살펴본다
1999년 '빅딜' 때문에 잘 나가던 반도체 잃어
LG그룹의 반도체사업은 1979년 대한전선 계열 대한반도체를 인수한 것에서 시작됐다. 사업이 본격화한 건 1989년 고(故) 구본무 LG 회장이 금성일렉트론을 설립하면서부터다. 경북 구미와 충북 청주에 생산거점을 마련했다. 1990년 1메가 D램, 1991년 4메가 D램을 출시하며 '라이벌' 삼성전자와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1995년 럭키금성이 LG로 그룹명을 바꾸면서 금성일렉트론은 LG반도체로 사명을 변경한다. 1995년 순이익은 9000억원에 달했다. D램 시장에선 세계 6위까지 올라간다. 당시 구본준 고문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LG반도체에 몸 담으며 전무,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LG가 '미래 주력사업'이었던 반도체 사업을 놓은 건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5대그룹 대상 '빅딜'을 추진했다. 1998년 7월 '5대그룹 7대 업종 구조조정계획'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도체업종에선 세계 4위 현대전자와 6위 LG반도체의 통합이 본격 논의됐다. 두 그룹 모두 '미래 먹을거리'를 쉽게 내놓지 않으려고했다. 컨설팅회사 아서D리틀이 "현대전자가 통합주체로 적합하다"는 결과를 12월24일 내놨다. LG는 크게 반발했다. 구 회장은 LG그룹의 미래 먹거리인 반도체 사업을 내놓으면 LG 미래도 없다고 생각했다.
강제 빅딜에 '통음'한 구 회장
약 일주일 뒤인 12월30일 구본무 회장은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과 만났다. 서울 플라자호텔 일식집에서 구 회장과 이 위원장이 만났다고한다. 이 자리에서 구 회장에게 'LG 반도체 포기'를 종용했다. 김 대통령의 정확한 의중을 듣고 싶었던 구 회장은 약 일주일 뒤인 1999년 1월6일 청와대로 들어간다. 구 회장은 김 대통령에게 반도체사업을 이어가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지만 청와대의 반응은 차가웠다. 결국 구 회장은 LG반도체를 내놓기로 마음먹었다. 이날 집무실로 돌아온 구 회장은 측근들과 통음을 하며 "모든 것을 다 버렸다"는 말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이후 현대전자와 LG반도체 간 협상은 시작됐지만 쉽게 합의되진 않았다. 3개월이 지난 구 회장과 고(故) 정몽헌 현대 회장은 4월19일 만나 각자가 기대했던 평균값에 거래를 합의했다. LG반도체 지분 60% 기준 2조5600억원이었다. 낙담한 구 회장은 이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에 대부분 불참했다.
그 때부터 LG에서 '반도체'는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이됐다. 역설적으로 LG반도체를 흡수한 현대전자도 '승승장구'한 건 아니다. 2001년 하이닉스반도체란 이름으로 새출발을 했지만 재무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채권단 관리를 받게됐다. 2012년 SK그룹에 인수되면서부터 하이닉스는 본연의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15년만에 아문 상처…실리콘웍스 인수
LG의 상처가 아무는데는 15년이 걸렸다. 2014년 5월 LG는 코멧네트워크가 보유한 지분 16.52%와 LG디스플레이가 가진 지분 2.89%를 865억원에 매입한다. 당시 언론과 증권가에선 "LG가 반도체 사업으로의 확장을 도모하는 첫 발걸음"이란 평가가 나왔다. 업계에선 이런 이유로 LG는 당시 매물로 나왔던 파운드리(반도체수탁생산)업체 동부하이텍(현 DB하이텍)의 유력한 인수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참고로 동부하이텍은 여러 차례 매각이 무산된 끝에 동부그룹(현 DB그룹) 품에 남았고 현재 DB하이텍으로 사명을 바꿨다. 8인치 파운드리를 주력으로 상반기 매출 4675억원, 영업이익 1418억원을 기록할 정도로 선전 중이다.)비슷한 시기 LG전자가 스마트폰용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 독자 개발에 나선 것도 LG그룹의 '반도체에 대한 미련'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란 평가가 나온다. LG전자는 파운드리 업체 대만의 TSMC와 손잡고 독자 AP 개발 프로젝트인 '오딘'을 가동했다. 2014년 10월엔 '뉴클런'이란 AP를 독자 개발하고 LG G3 등 일부 LG 스마트폰에 탑재했다. 하지만 시장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2017년 LG전자는 통신칩 생산을 포기했다. 2017년엔 LG가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를 생산하는 'LG실트론'을 SK그룹에 매각하면서 '반도체기업'이라고 볼 수 있는 LG 계열사는 실리콘웍스만 남게됐다. 내년 5월 구본준 고문과의 계열 분리가 완료되면 실리콘웍스마저 LG품을 떠나게 된다.
구광모 회장, 차량용 반도체기업 M&A 나설까
LG그룹이 반도체사업을 이대로 포기할까. 산업계에선 "아닐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독립 반도체 계열사는 없어지게 됐지만 LG그룹 안에서 LG전자가 반도체 개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앞에 설명한 것처럼 LG전자의 스마트폰용 독자 AP 개발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TV, 가전제품용 반도체는 꾸준히 개발해 자사 제품에 적용하고 있다. 최근엔 인공지능(AI)칩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LG전자의 TV에 들어가는 '인공지능 알파9 8K' 프로세서가 대표적인 사례다. LG전자는 이 칩에 대해 "독자 개발한 화질 칩에 딥러닝 기술을 더해 화질, 사운드를 알아서 최적화한다"고 설명한다. LG전자는 로봇청소기,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등 다양한 제품에 범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AI칩'도 개발했다. LG전자는 인간의 뇌 신경망을 모방한 인공지능 프로세서인 'LG뉴럴엔진'을 AI칩에 내장해 딥러닝 알고리즘의 처리성능을 높였다. LG전자 관계자는 "LG전자가 반도체사업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만 내부엔 개발 조직과 인력이 아직 남아있다"고 말했다.반도체 업체에 대한 인수합병(M&A) 가능성도 열려있다. 구광모 회장 취임 이후 '선택과 집중'을 통한 계열사 사업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LG그룹이 현재 확보한 현금성 자산만 16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LG가 그룹차원에서 전기차 배터리(LG에너지솔루션), 차량용 디스플레이(LG디스플레이), 차량용 조명(ZKW), 자동차 전장(전기·전자 장치, LG전자 VS사업본부) 등 차 관련 사업을 '미래 먹을거리'로 꼽고 있다는 점에서 '차량용 반도체' 기업 등에 대한 M&A 가능성도 열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구광모 회장과 최고 경영진의 '대형 M&A'에 대한 관심도 크다고 한다. LG가 반도체사업을 '포기했다'고 보기엔 아직 이른 것이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