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詩 읽는 CEO] 함민복 시인을 울린 우편배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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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아침시편]우표
- 함민복
판셈하고 고향 떠나던 날
마음 무거워 버스는 빨리 오지 않고
집으로 향하는 길만 자꾸 눈에서 흘러내려
두부처럼 마음 눌리고 있을 때
다가온 우편배달부 아저씨
또 무슨 빚 때문일까 턱, 숨 막힌 날
다방으로 데려가 차 한 잔 시켜주고우리가 하는 일에도 기쁘고 슬픈 일이 있다며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
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라고
손목 잡아주던
자전거처럼 깡마른 우편배달부 아저씨
낮달이 되어 쓸쓸하게 고향 떠나던 마음에
따뜻한 우표 한 장 붙여주던
1962년 충북 충주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우울 씨의 일일』,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등 출간. 김수영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등 수상.
요즘같이 어려울 때 마음에 위로가 되는 시다. ‘우표’로 상징되는 우편배달부의 속 깊은 정이 애잔하면서도 따뜻하다. 시 첫 줄에 나오는 ‘판셈’은 ‘빚잔치’를 말한다. 남은 재산으로 빚돈을 모두 청산하고 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다.
함민복 시인은 어려서부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인문계 고등학교 대신 수도전기공고로 진학했다. 졸업 후 경주에 있는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4년간 일했다. 이 시의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 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라는 대목처럼 그는 월급을 아껴서 집에 우체국 전신환을 또박또박 보냈다. 하지만 가난의 굴레에서는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사이에 우편배달부는 빚 독촉 우편물을 전하며 안타까워했다. 급기야 빚잔치를 하고 ‘낮달이 되어 쓸쓸하게 고향 떠나던’ 날 ‘두부처럼 마음 눌리고 있을 때’ 그 배달부가 다가왔다. ‘또 무슨 빚 때문일까 턱,’하고 숨이 막힐 만도 했다.
그 다음 순간 반전이 일어났다. 배달부는 그를 다방으로 데려가 차를 한 잔 시켜주고는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라고’ 위로하면서 손목을 잡아줬다. ‘자전거처럼 깡마른’ 아저씨가 건넨 특별한 격려는 외롭고 쓸쓸한 그의 마음에 붙여준 ‘따뜻한 우표 한 장’이었다. 그 ‘우표’는 훗날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됐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어릴 적 나에게 힘이 돼 줬던 한 사람을 떠올린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절집에 함께 살던 처사 하석근 아저씨가 밤늦게 나를 밖으로 불러내서는 한참 만에 말을 꺼냈다. “나는 니보다 더 어릴 때 아부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뒤로 한 번도 기를 못 펴고 살았다. 니는 절대로 그러지 마라. 평생 무슨 일이 있어도… 기죽으면 안 된대이.”
그날 밤 아저씨가 해준 그 한마디는 내가 힘들고 지칠 때 기죽지 않고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돼 줬다. 나중에는 ‘하석근 아저씨’라는 시까지 낳게 해 줬다.
‘격려(encouragement)’라는 말은 라틴어 ‘심장(cor)’에서 나왔다. 풀이하자면 ‘심장을 준다’는 의미다. 뜨거운 심장을 주듯 마음의 뿌리를 덥혀주는 게 격려다. ‘용기(courage)’라는 말 역시 같은 어원에서 나왔으니 그 뿌리도 ‘심장’이다. 함민복 시인에게는 ‘심장을 내어 준’ 사람이 우편배달부 아저씨다. 그 아저씨 덕분에 힘을 얻고 마음을 다잡은 그는 원자력발전소에서 틈틈이 공부해 남보다 늦게 서울예대 문창과에 들어갔다. 2학년 때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수많은 시로 사람과 세상을 위로했다.
그가 강화도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96년. 마니산에 놀러갔다가 너무 좋아 인근 폐가를 빌려 정착했다. 그는 월세 10만 원짜리 방에서 바다와 갯벌을 노래하다 생활비가 떨어지면 방 가운데 빨랫줄에 걸린 시 한 편을 떼어 출판사로 보내곤 했다.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시 ‘긍정적인 밥’ 부분)라던 시인은 50세에 동갑내기 ‘문학소녀’를 만나 결혼했다. 둘이서 ‘길상이네’라는 인삼가게를 열었고, 이제는 번듯한 집도 지었다. 이만하면 옛날 ‘판셈하고 고향 떠나던 날’에 비해 ‘큰 부자’가 됐다. 이런 게 다 ‘마음에/ 따뜻한 우표 한 장 붙여주던’ 우편배달부 아저씨 덕분일 것이다.
함민복 시인의 심성은 그의 시 제목처럼 ‘말랑말랑한 힘’과 ‘선천성 그리움’의 경계에서 피는 꽃을 닮았다.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시 ‘선천성 그리움’ 전문)
이 시를 보면서 또 생각한다. 심장은 왜 왼쪽에 있을까. 보고 싶으면 두근거리고, 마주 보면 콩닥거리고, 안아 보면 화끈거리는 영혼의 숯불이기 때문일까. 서로 껴안으면서 상대의 오른쪽 가슴을 달구는 ‘선천성 그리움’의 잉걸불이기 때문일까. 그곳에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운명 때문에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처럼 화들짝거리고, ‘내리치는 번개’보다 더 뜨거운 사랑이 혈관처럼 팔딱거린다. 지금 강화에 가면 시인의 왼쪽에서 ‘선천성 그리움’의 몸짓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동갑내기 부인을 만날 수 있다. 그곳에서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로 시작하는 함민복 시 ‘부부’의 진정한 의미와 인생의 또 다른 속내를 발견할 수도 있다.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