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공시 강화에 녹색투자 압박…기업들 "CGO까지 신설할 판"
입력
수정
지면A3
정부, 탄소세 도입도 검토정부가 7일 발표한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월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실현하겠다”고 깜짝 선언한 뒤 정부가 내놓은 초안이다. 첫 청사진인 만큼 비전과 방향 중심이라는 게 정부 설명이지만 내용의 구체성이 떨어지고 재원 조달 방안이 빠져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탄소중립 내세워 공시의무·연기금 통한 '투자지침' 강화
배출권 구매비용에 세금까지 늘리면 기업 부담 가중될듯
산업계 "기업과 논의 없이 목표만 제시…속도조절 필요"
정부는 또 국내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지원책 위주로 담았지만 군데군데 들어간 환경 규제가 산업계에 큰 부담이 될 전망이다. 기업의 환경공시 의무를 강화하거나 녹색투자를 의무화하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 “탄소중립 정책 때문에 최고환경책임자(CGO·Chief Green Officer)를 신설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기업의 환경 관련 비용 급증할 듯
정부는 탄소중립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세제와 부담금 제도를 개편하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탄소와 관련된 각종 에너지 세금과 부담금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가격 체계를 다시 정하기로 했다. 기업들은 경유세가 오르고 탄소세가 신설되는 형태로 에너지 세제가 개편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전기요금이 오를 공산도 크다고 예상한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지금 단계에서 탄소세 도입과 경유세 인상 여부를 말씀드리는 건 적절하지 않다”며 가능성을 열어놨다.정부는 탄소배출권 거래제 관련 기준을 높이는 방안도 검토한다.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정부가 매년 기업의 탄소배출 총량을 정한 뒤 배출권을 할당해주고 배출권이 모자라는 기업은 남는 기업으로부터 구매해 쓰도록 하는 제도다. 2015년 처음 도입돼 내년 3차 계획에 들어간다. 배출권 거래제 적용 대상이 62개 업종, 589개 업체에서 69개 업종, 685개 업체로 늘어난다. 유상할당 비중은 3%에서 10%로 높아진다. 총할당이 100이라면 이 중 10은 배출권을 사들이거나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는 얘기다. 정부는 유상할당 비중을 더 높일 수 있다고 예고했다.기업들은 이미 탄소배출권 거래제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탄소배출권 가격이 계속 뛰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t당 8640원이던 배출권 가격은 이듬해 평균 1만7179원으로 올랐다. 지난해에는 평균 2만9126원 수준에 거래됐다. 올해도 t당 2만~3만원 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올 들어 10월까지 한국거래소에서 거래된 탄소배출권 규모는 5941억8400만원에 달했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세계 최고 수준의 탄소 저감 기술을 적용하고 있지만 탄소 감축이 한계에 다다랐다”며 “당장은 돈을 주고 배출권을 사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털어놨다.
“정부와 기업 간 충분한 논의 필요”
직접적인 비용 외에 간접적인 규제도 기업들의 비용 부담을 늘리는 요인으로 꼽힌다. 정부는 기업의 환경 리스크와 관리 시스템 같은 환경정보가 폭넓게 공개되도록 공시 의무를 단계적으로 강화하기로 했다. 또 국민연금 같은 기관투자가가 수탁자로서 책임을 다하도록 행동원칙을 규정한 ‘스튜어드십 코드’에 환경 관련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을 넣는 방안을 검토한다. 기관투자가가 의무적으로 녹색투자에 나서도록 ‘책임투자 가이드라인’을 바꾸는 방안도 추진한다. 이렇게 되면 국민연금 같은 연기금이 기업에 “탄소중립 정책을 강화하라”고 압박하는 사례가 나올 수 있다.기업들도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는 점에 공감한다. 그러나 정부가 산업계와 상의하지 않고 덜컥 목표만 제시하고 있다는 불만이 나온다.산업 특성상 탄소 배출량이 많은 기업들은 “‘탄소중립’ 때문에 비상경영에 들어가야 할 판”이라고 하소연한다.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등의 업종은 유연탄 나프타 석회석 같은 원료를 아예 바꿔야 한다. 제조 과정에서 탄소 배출이 많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자동차 업체들도 절박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은미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본부장은 “정부의 탄소중립 목표는 실험실이나 개념 차원의 기술 적용을 가정하고 정한 것”이라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때는 해당 기업들과 충분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인설/김일규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