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넘어 국민영양식…저출산 타격 매일유업을 '1등 기업'으로

다산경영상
전문경영인 부문 - 김선희 매일유업 사장

7년간 경쟁의 룰 바꾸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속도전
우유업계는 좀처럼 순위 변동이 없다. ‘한번 1등은 영원한 1등’이란 공식이 통하는 보수적인 시장이다. 7년 전부터 이 시장에 조용한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변화의 주인공이 바로 김선희 매일유업 사장(사진)이다. 그의 ‘속도전’이 유업계를 넘어 식품업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2014년 매일유업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그가 7년간 1등으로 밀어올린 브랜드만 3~4개다. 단백질 건강기능식품 ‘셀렉스’와 컵커피 ‘바리스타룰스’, 우유대체 음료 ‘아몬드브리즈’ 등이 그런 제품이다. 특히 성인영양식이라는 ‘전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분유와 우유 중심으로 1세부터 10세까지 영유아, 어린이 소비자만 바라보던 매일유업을 0세에서 100세까지 끌어안는 종합식품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식품업계에서 김 사장은 ‘경쟁의 룰을 바꿔버린 여전사’로 부른다.

“고령화는 위기 아닌 기회”

최근 10여 년간 흰우유 시장은 ‘가라앉는 배’와 같았다. 저출산으로 인해 우유 주 소비층인 영유아, 어린이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낙농 선진국 제품이 대거 국내 시장에 들어왔다. 업계에서는 ‘이대로 가면 모두 망할 것’이란 비관론이 팽배했다. 줄어드는 내수시장을 둘러싸고 흰우유 시장의 절대 강자인 서울우유협동조합과 남양유업, 매일유업 3사는 지루한 점유율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고령화’는 유업계의 악재였다. 김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숫자와 통계에 밝은 김 사장은 급격하게 늘어나는 50대 이상 노년층에서 해답을 찾았다. 근력이 줄어드는 노년층을 위한 단백질 강화 건강기능식품을 개발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해외에 가 보니 한국보다 먼저 고령사회를 맞은 선진국들이 ‘근감소증’을 새로운 질병으로 분류하고 대응하고 있었습니다. 30~40대 여성들도 단백질 보충제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마시더군요. 귀국하자마자 회사 내에 근감소증 연구소를 출범시켜 연구에 들어갔습니다.”매일유업은 업계에서 가장 먼저 단백질 식품 연구를 시작했다. 3년간 제품을 개발해 2018년 10월 성인영양식 브랜드 ‘셀렉스’를 출시했다. 전략은 통했다. 셀렉스 매출은 올해 6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년여 만에 전체 매출의 4%를 차지하는 효자 품목이 됐다.

경쟁사도 모두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단백질 건강기능식품 시장은 이제 주요 식품회사가 사활을 걸고 뛰어드는 주요 승부처가 됐다.

우유 대신 우유 대체식품 승부

김 사장이 유업계에서 성공한 비결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유업계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낙농업, 식품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새로운 전략을 시도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젊은 층이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면 우유 대체식품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면 된다”는 게 그의 전략이었다.김 사장은 새로운 시장을 찾기 위해 해외 현장을 누비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전엔 글로벌 트렌드를 볼 수 있는 국제 식품박람회가 열리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갔다. 세계 곳곳에서 발품 팔아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국내시장과 소비자를 철저히 분석했다.

이렇게 분석한 결과가 ‘소화가 잘되는 우유’다. 한국인 네 명 중 세 명은 우유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유당불내증’에 해당한다. 유당불내증 탓에 우유 소비가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해 개발된 소화가 잘되는 우유를 적극 홍보했다.

‘아몬드 브리즈’도 비슷한 개발 과정을 거쳤다. 미국에서 두유보다 세 배 이상 잘 팔리는 아몬드 음료를 찾아냈다. 칼로리가 낮은 저칼로리 음료 인기가 높은 국내 2030시장에서 승산이 있을 것으로 보고 글로벌 아몬드 공급회사 블루다이아몬드와 손잡았다. ‘아몬드 브리즈’는 원료를 들여와 100% 국내에서 생산한다. 이 제품 매출은 매년 60% 이상 성장하고 있다.

속도전에 강한 승부사

김 사장은 현장에서 얻은 영감을 바로 실행으로 옮기는 현장형 리더다. 한번 실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추진한다. “기회가 보이면 빨리 움직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타이밍, 퀄리티, 마케팅 이 세 박자가 맞아떨어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김 사장은 혁신에 지칠 줄 모른다. 2017년 지주회사 매일홀딩스를 설립했다. 지배구조를 단순화해 경영 비효율을 제거해야 한다는 전략에서다. 지난해에는 마이크로소프트사와 협업해 사내 데이터를 모두 클라우드로 이전했다.

김 사장은 판매시장을 중동, 동남아시아 등으로 넓히고, 제품군을 프리미엄 유기농 제품과 영유아용 이유식 쪽으로 확장하고 있다. 이런 새로운 시장 창출과 사업 다각화 노력에 힘입어 매일유업은 지난해 영업이익 기준으로 유(乳) 업계 1등에 올랐다.

■ 김선희 사장은
乳가공업계 1호 여성 CEO…내·외부 소통으로 체질 개선 성공

김선희 사장은 국내 우유 가공업계에서 여성 최초 최고경영자(CEO)다. 그러나 우유업계에서 출발한 건 아니다. 첫 발걸음은 금융업에서 뗐다. 연세대 불문과를 졸업한 김 사장은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마쳤다. MBA 전공은 재무였다. 그 후 BNP파리바은행 한국지점과 크레디아그리콜은행 한국지점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다 한국씨티은행 신탁위험 관리부장, 투자은행 UBS 아시아태평양지역 위험관리부문 이사 등을 거쳤다.

김 사장이 매일유업에 합류한 건 2009년. 제품 품질 관련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매일유업 회사 전체가 흔들리던 때였다. 생존까지 걱정해야 할 위기의 순간이었다. 김정완 매일유업 회장은 서울우유협동조합, 남양유업 등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독한 변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무통으로 불리면서 똑부러지는 ‘사촌동생’인 김 사장을 회사로 불러들였다.

김 사장의 첫 직책은 재경본부장(전무)이었다. 그는 “첫 3년은 우리 부서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내 문화(부서 이기주의)와의 싸움이었다”고 회고했다. 2014년 매일유업 사장에 취임한 그는 회사 분위기를 크게 바꿔놨다.

CJ, 삼성전자 임원 출신 등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중식 레스토랑 ‘크리스탈 제이드’와 이탈리아 레스토랑 ‘더 키친 살바토레’ 등만 남기고 부진한 외식 브랜드를 정리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지금도 유업계 유일한 여성 CEO인 김 사장은 “여성의 소통 능력이 회사 내·외부 소통과 문제 해결 과정에서 강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사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가족’이다. 여성 CEO로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장 취임 직후 육아 문제로 고민하는 직원들을 위해 탄력근무제를 도입했다. 출산휴가도 적극 권장했다. 지난해에는 임신한 직원 가족을 서울시내 호텔로 초청해 1박2일 육아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 김선희 사장 약력△1964년 서울 출생
△1988년 연세대 불문과 졸업
△미국 미네소타대 경영학 석사(MBA)
△1995년 BNP파리바은행 한국지점 애널리스트
△2005년 한국씨티은행 신탁리스크 관리부장
△2009년 매일유업 재경본부장(전무)
△2014년 매일유업 대표이사 사장

글=박종필/김보라/사진=김범준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