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관심을 먹고 사는 과학기술

이우일 < 한국과총 회장, 서울대 명예교수 wilee@kofst.or.kr >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9월 20개국을 대상으로 한 과학기술 신뢰도 측정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국은 ‘과학기술을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고 답한 비율이 14%에 불과해 꼴찌에 머물렀다. 대상국 평균이 36%인 것을 고려하면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다. 또 다른 나라에선 정치 성향이 진보적일 경우 과학기술을 더 신뢰하는 것이 보편적 경향이었는데 한국은 이마저도 거의 비슷했다. 이유를 찾자면 여러 가지 분석이 있겠으나 과학기술의 대국민 소통 부족이 드러난, 깊은 자성이 필요한 결과임엔 틀림없다.

우리나라와 미국을 대상으로 과학기술 인지도를 조사·비교한 자료를 보면 미국이 65점 전후이고, 우리는 2000년 조사 시작 이후 50점을 넘은 적이 없다. 이마저도 최근에는 30점대로 추락했으니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 청소년의 관심도는 2018년 47.2점으로 성인보다 현저히 높게 나타나, 나이가 들수록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현상은 과학기술이 미래를 좌우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경쟁력이 뒤처질 수밖에 없는 심각한 문제다.세종대왕의 눈부신 업적은, 그 시작이 즉위 2년 차인 1420년 3월에 설치한 집현전이었다. 그렇지만 세조의 계유정난 등 모든 이슈가 정치로 집중되면서 집현전은 36년 만에 폐지되고 만다. 연산군일기에는 김검동과 김감불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함경도 기술자로 연산군 앞에서 새로운 은(銀) 제련법을 시연한 뒤,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아뢴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었다.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기술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당시 조선에서 건너간 도자기 기술과 함께 일본 근대화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해주며 한반도 침략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골든타임을 놓쳤던 것이다.

인공지능(AI), 기후 변화와 같은 다양한 과학기술 분야가 일상이 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만 보더라도 가짜뉴스에 휩쓸리지 않고 개인의 위생과 안전을 지키려면 기본적인 과학 지식이 필수다. 그런데 고교 교육과정을 보면 과학은 8과목으로 나뉘었고, 사회 9과목과 합쳐 17개 과목 가운데 2개를 선택하면 된다. 학생의 자율적 학습권 보장이란 취지는 좋지만, 기후 변화가 끼칠 심대한 영향을 생각하면 적어도 최소한의 지식은 갖춰야 할 텐데 이대로라면 기본적 지식조차 학습할 기회가 없다.

과학기술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인 팍스테크니카가 다가오고 있다. 과학기술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런데 우리는 과학기술이 가져다주는 성과에만 목말라할 뿐, 정작 과학기술에는 무관심하다. K팝 성공에서 보듯이 관심은 성장의 토양이 된다.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높일 방안을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