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이 식물도감?…덴마크 자존심 로얄코펜하겐 수천 번의 붓질로 완성한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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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스토리출구 없는 터널에 갇힌 듯한 한 해의 끝자락. 그나마 다가오는 크리스마스가 12월을 버틸 수 있는 한줄기 마음의 위안이다. 아름답게 차린 크리스마스 식탁, 이 그림에 가장 어울리는 테이블웨어 중 하나는 245년 역사를 지닌 덴마크의 도자기 브랜드 로얄코펜하겐이다.
로얄코펜하겐의 역사는 1775년 덴마크 줄리안 마리 황태후의 후원으로 왕실에 도자기를 공급하면서 시작됐다. 100년간 왕족이 운영하며 왕실에만 보급하다가 1868년 민영화됐다. 이후에도 여전히 왕실의 용인 아래 ‘로열’이라는 칭호를 유지하며 식기 이상의 가치, 왕실 전통과 문화에 대한 덴마크 사람들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브랜드가 됐다.로얄코펜하겐의 ‘플로라 다니카’ 라인은 1790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7세가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보낼 선물로 주문하며 탄생했다. 덴마크 식물도감에 수록된 2500여 종의 꽃과 양치류 세밀화를 수천 번의 붓질로 자기에 옮겨 담았다. 오버글레이즈(초벌구이를 마친 뒤에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발라 고온에서 재벌구이하는 기법)로 화가의 캔버스를 보는 듯 다채로운 색감을 구현한다. 정교하게 그린 꽃잎 페인팅과 화려한 금박 장식은 모두 장인의 손으로 완성해 도자기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최초의 디너웨어 라인인 패턴 No.1 ‘블루 플레인Blue Plain’은 1775년에 선보였다. 국화를 추상화한 문양의 장식 요소와 절제미, 고전적 아름다움이 잘 어우러진 시그너처 라인이다. 1885년 화가이자 건축가인 아르놀 크로그가 아트 디렉터로 합류하면서 블루 풀레이스와 블루 하프레이스로 패턴을 재해석·재구성해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이며 확장됐다. 하얀 도자기 위에 수채화처럼 맑은 붓질로 완성한 푸른 패턴, 동양의 신비로움을 유럽적 취향으로 표현한 이 투명한 블루 느낌은 로얄코펜하겐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다. 장인들은 1000회가 넘는 붓질을 하고 마지막에 접시 뒷면에 자신의 이니셜을 적어 마무리한다.
로얄코펜하겐은 다양한 예술가와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때의 원칙은 ‘인지’와 ‘리뉴얼’.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245년의 유산을 제대로 알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적 감각을 불어넣어 전통과 소통하는 디자인을 선보이는 것을 이른다. 이 때문에 로얄코펜하겐의 식기는 과거와 현재의 제품이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어떻게 믹스 매치해도 잘 어울린다. 그중 2000년 카렌 키엘고르 라르센과 함께 선보인 ‘메가’(블루 플레인의 문양 중 일부를 확대한 패턴)와 2008년 루이스 캠벨과 함께 선보인 ‘엘레먼츠’(전통적 제품 저마다의 상징적 디자인 요소를 결합해 모던하게 표현)는 이들의 디자인 철학을 가장 잘 보여준다. 2018년에는 1779년 출시한 패턴 No.2 블루 플라워를 재해석해 ‘블롬스트’를, 2019년에는 1892년 출시한 ‘시걸’ 패턴을 재해석해 디너웨어 컬렉션 ‘하우’로 재탄생시키며 고전미와 현대미를 아우르고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그릇장 속에 쟁여뒀던 그릇을 꺼내 식탁을 아름답게 채워보면 어떨까. 일상의 럭셔리는 멀리 있지 않다.
구선숙 < 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 편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