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시 읽는 CEO- [고두현의 아침시편] 붓 1000자루·벼루 10개 갈아 없앤 추사의 신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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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란(不作蘭)
-벼루 읽기
이근배
다시 대정(大靜)에 가서 추사를 배우고 싶다
아홉 해 유배살이 벼루를 바닥내던
바다를 온통 물들이던 그 먹빛에 젖고 싶다획 하나 읽는 줄도 모르는 까막눈이
저 높은 신필을 어찌 넘겨나 볼 것인가
세한도(歲寒圖) 지지 않는 슬픔 그도 새겨 헤아리며
시간도 스무 해쯤 파지(破紙)를 내다보면
어느 날 붓이 서서 가는 길 찾아질까
부작란 한 잎이라도 틔울 날이 있을까
이근배: 1940년 충남 당진 출생. 1961~1964년 경향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시·시조·동시 당선.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 『노래여 노래여』, 『추사를 훔치다』 등 펴냄. 유심작품상, 육당문학상, 만해대상 등 수상.추사 김정희에 관한 시 한 편을 더 소개한다. 위의 시에 나오는 ‘대정(大靜)’은 추사가 유배 살던 귀양지다. 추사가 여섯 차례의 국문 끝에 초주검이 돼 제주도 대정골에 유배된 것은 54세 때인 1840년이었다. 가까스로 죽음은 면했지만 도성에서 가장 먼 섬으로 쫓겨났으니 돌아갈 기약이 없었다. 언제 사약을 받으라는 금부도사의 행차가 있을지 모르는 나날이었다. 그곳에서 9년을 보내는 동안 추사는 ‘먹빛’ 같은 바다를 보며 벼루에 바닥이 날 정도로 글과 그림에 몰두했다.
그 외롭고 쓸쓸한 적소(謫所)의 어둠 속에서 탄생한 걸작이 조선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세한도(歲寒圖)’다. ‘세한도’는 ‘추운 계절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추위는 엄혹한 세태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 속에는 ‘그림에서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가 느껴져야 한다’는 추사 특유의 화론(畵論)이 녹아 있다.
추사가 이곳에서 그린 또 다른 작품이 ‘부작란(不作蘭)’이다. 난을 그리고도 그것을 그리지 않았다는 제목의 이 그림에 그는 ‘난을 치지 않은 지 스무 해 만에 뜻하지 않게 깊은 마음속 하늘을 그려냈다’는 글귀를 덧붙였다. 엷은 먹빛으로 그린 난은 연약한 듯하지만 구부러진 획에서는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이근배 시인이 이 그림을 보고 ‘저 높은 신필을 어찌 넘겨나 볼 것인가’라고 탄복한 것도 그 속에 웅숭깊은 ‘슬픔’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신필’의 경지는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추사는 슬프거나 힘들 때, 억울할 때에도 붓을 들었다. 글씨가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썼다. 그렇게 쓰고 또 쓴 글씨로 마침내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했다. 그는 70 평생에 열 개의 벼루를 갈아 없애고 1000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다. 그 정신을 이어받은 이근배 시인도 벼루를 1000점 이상 소장하고 있다.
이근배 시인은 올해 등단 60년을 맞았다. 1960년 첫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를 펴내고, 이듬해부터 4년 동안 신춘문예 다섯 군데를 휩쓸었다. 신춘문예 5관왕은 한국문학사상 초유의 진기록이다. 1961년 서울신문 시조 ‘벽’과 경향신문 시조 ‘묘비명’으로 2관왕을 차지했고, 이듬해 동아일보 시조 ‘보신각종’, 조선일보 동시 ‘달맞이꽃’, 1964년 한국일보 시 ‘북위선’으로 5관왕을 달성했다.
한국일보에 당선된 그해 동아일보에도 시가 당선됐지만, 두 군데 동시 당선이라고 해서 한 곳을 포기해야 했다. 당시 신춘문예 당선 상금이 한국일보 5000원, 동아일보 2500원이어서 그는 상금이 많은 곳을 택했다. 훗날 그는 “너무 가난하던 시절이라 상금 주는 데가 많지 않아 자꾸 투고하기도 했지만 나중엔 ‘너는 시조만 되고 자유시는 안되지’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시 부문에 다시 응모했다”고 말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충남 당진 읍내에서도 25리 떨어진 산골이었다. 다행히 광복 다음해인 1946년에 학교에 들어가서 모국어 교육 원년 세대가 됐다. 그는 스스로를 ‘한글둥이’라고 부른다. 모국어 사랑도 특별하다.
“모국어는 어머니의 나라 말이죠. 내 나라는 할아버지 조(祖)를 써서 조국(祖國)이라고 하는데 내 나라 말은 어미 모(母)자를 쓰지요. 우린 말을 배울 때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배웁니다. 뱃속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모국어, 어머니의 말입니다.”
젊어서는 “남들이 막장에 들어가 모국어의 보석을 캘 때 갱구 앞에서 부스러기 돌이나 줍고 있었다”(‘문학적 자전’)며 겸손해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우리 모국어의 연금술사다. 위의 시 ‘부작란’에도 어머니의 말이 주는 감흥과 밀도 있는 성찰의 뿌리가 깊게 얽혀 있다.
추사의 ‘세한도’와 ‘부작란’은 지금 우리에게 엄동설한을 맨몸으로 꿋꿋이 이겨내는 송백의 정신과 권력지향적인 세태의 어둠을 동시에 비춰준다.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시들지 않는 푸르름을 알 수 있다’던 세한도의 정신처럼 우리도 한 20년쯤 ‘시간의 파지’를 내다 보면 ‘붓이 서서 가는’ 명철의 경계를 넘겨나 볼 수 있을지, 시인의 소망처럼 ‘부작란 한 잎이라도 틔울 날’이 있을지….
-벼루 읽기
이근배
다시 대정(大靜)에 가서 추사를 배우고 싶다
아홉 해 유배살이 벼루를 바닥내던
바다를 온통 물들이던 그 먹빛에 젖고 싶다획 하나 읽는 줄도 모르는 까막눈이
저 높은 신필을 어찌 넘겨나 볼 것인가
세한도(歲寒圖) 지지 않는 슬픔 그도 새겨 헤아리며
시간도 스무 해쯤 파지(破紙)를 내다보면
어느 날 붓이 서서 가는 길 찾아질까
부작란 한 잎이라도 틔울 날이 있을까
이근배: 1940년 충남 당진 출생. 1961~1964년 경향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시·시조·동시 당선.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 『노래여 노래여』, 『추사를 훔치다』 등 펴냄. 유심작품상, 육당문학상, 만해대상 등 수상.추사 김정희에 관한 시 한 편을 더 소개한다. 위의 시에 나오는 ‘대정(大靜)’은 추사가 유배 살던 귀양지다. 추사가 여섯 차례의 국문 끝에 초주검이 돼 제주도 대정골에 유배된 것은 54세 때인 1840년이었다. 가까스로 죽음은 면했지만 도성에서 가장 먼 섬으로 쫓겨났으니 돌아갈 기약이 없었다. 언제 사약을 받으라는 금부도사의 행차가 있을지 모르는 나날이었다. 그곳에서 9년을 보내는 동안 추사는 ‘먹빛’ 같은 바다를 보며 벼루에 바닥이 날 정도로 글과 그림에 몰두했다.
그 외롭고 쓸쓸한 적소(謫所)의 어둠 속에서 탄생한 걸작이 조선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세한도(歲寒圖)’다. ‘세한도’는 ‘추운 계절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추위는 엄혹한 세태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 속에는 ‘그림에서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가 느껴져야 한다’는 추사 특유의 화론(畵論)이 녹아 있다.
추사가 이곳에서 그린 또 다른 작품이 ‘부작란(不作蘭)’이다. 난을 그리고도 그것을 그리지 않았다는 제목의 이 그림에 그는 ‘난을 치지 않은 지 스무 해 만에 뜻하지 않게 깊은 마음속 하늘을 그려냈다’는 글귀를 덧붙였다. 엷은 먹빛으로 그린 난은 연약한 듯하지만 구부러진 획에서는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이근배 시인이 이 그림을 보고 ‘저 높은 신필을 어찌 넘겨나 볼 것인가’라고 탄복한 것도 그 속에 웅숭깊은 ‘슬픔’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신필’의 경지는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추사는 슬프거나 힘들 때, 억울할 때에도 붓을 들었다. 글씨가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썼다. 그렇게 쓰고 또 쓴 글씨로 마침내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했다. 그는 70 평생에 열 개의 벼루를 갈아 없애고 1000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다. 그 정신을 이어받은 이근배 시인도 벼루를 1000점 이상 소장하고 있다.
이근배 시인은 올해 등단 60년을 맞았다. 1960년 첫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를 펴내고, 이듬해부터 4년 동안 신춘문예 다섯 군데를 휩쓸었다. 신춘문예 5관왕은 한국문학사상 초유의 진기록이다. 1961년 서울신문 시조 ‘벽’과 경향신문 시조 ‘묘비명’으로 2관왕을 차지했고, 이듬해 동아일보 시조 ‘보신각종’, 조선일보 동시 ‘달맞이꽃’, 1964년 한국일보 시 ‘북위선’으로 5관왕을 달성했다.
한국일보에 당선된 그해 동아일보에도 시가 당선됐지만, 두 군데 동시 당선이라고 해서 한 곳을 포기해야 했다. 당시 신춘문예 당선 상금이 한국일보 5000원, 동아일보 2500원이어서 그는 상금이 많은 곳을 택했다. 훗날 그는 “너무 가난하던 시절이라 상금 주는 데가 많지 않아 자꾸 투고하기도 했지만 나중엔 ‘너는 시조만 되고 자유시는 안되지’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시 부문에 다시 응모했다”고 말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충남 당진 읍내에서도 25리 떨어진 산골이었다. 다행히 광복 다음해인 1946년에 학교에 들어가서 모국어 교육 원년 세대가 됐다. 그는 스스로를 ‘한글둥이’라고 부른다. 모국어 사랑도 특별하다.
“모국어는 어머니의 나라 말이죠. 내 나라는 할아버지 조(祖)를 써서 조국(祖國)이라고 하는데 내 나라 말은 어미 모(母)자를 쓰지요. 우린 말을 배울 때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배웁니다. 뱃속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모국어, 어머니의 말입니다.”
젊어서는 “남들이 막장에 들어가 모국어의 보석을 캘 때 갱구 앞에서 부스러기 돌이나 줍고 있었다”(‘문학적 자전’)며 겸손해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우리 모국어의 연금술사다. 위의 시 ‘부작란’에도 어머니의 말이 주는 감흥과 밀도 있는 성찰의 뿌리가 깊게 얽혀 있다.
추사의 ‘세한도’와 ‘부작란’은 지금 우리에게 엄동설한을 맨몸으로 꿋꿋이 이겨내는 송백의 정신과 권력지향적인 세태의 어둠을 동시에 비춰준다.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시들지 않는 푸르름을 알 수 있다’던 세한도의 정신처럼 우리도 한 20년쯤 ‘시간의 파지’를 내다 보면 ‘붓이 서서 가는’ 명철의 경계를 넘겨나 볼 수 있을지, 시인의 소망처럼 ‘부작란 한 잎이라도 틔울 날’이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