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의 법과 법정] 사회의 질서·평화를 지켜주는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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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37
준거틀마다 다른 常識, 헌법과 법률에 기초개인은 양심에 따라, 사회는 상식에 따라 규율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좋은 말이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서로 다른 상식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충돌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기득권 남용 억제 위해 배려·양보·관용 필요
구성원이 동의한 '공통상식'이 '건강사회' 비결
윤성근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양심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며 반드시 훌륭하고 보편적인 도덕률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칼럼을 통해 언급한 바 있다(<양심의 자유는 어디까지 존중해야 할까>). 원칙적으로 각자의 양심은 존중돼야 하지만 자신의 기준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같은 이유로 법관이 재판에서 따라야 하는 양심은 개인적 양심이 아니라 직업적 양심이다.상식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상식이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장 평범하고 단순 명백하며 직관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가치관 내지 판단능력이라고 말한다면 심각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나의 상식이 사회에 통용되는 상식인가 하는 점은 깊은 성찰과 계속적 점검을 요한다. 각자 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살펴보면 그중에는 인류 공통의 상식, 한국인의 상식, 남성 또는 여성의 상식, 자기가 속한 세대의 상식, 자기가 속한 직업군의 상식 등 출처를 달리하는 복합적인 관념들이 뭉뚱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인의 상식과 젊은이의 상식은 서로 다르다. 의사의 상식과 일반인의 상식도 다르다. 의사 중에서도 심장외과 전문의 집단의 상식과 의사 일반의 상식은 또 서로 다르다. 이런 ‘일정한 소속 집단의 상식’이라는 준거틀은 법적인 책임 판단에서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불필요한 상식의 충돌을 막기 위해서는 각자 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의 준거틀을 식별해야 한다.
상식은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조선시대에 신분차별, 남녀차별, 적서(嫡庶)차별은 상식에 속했다. 이제 이런 차별에 동의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법원이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고 판시한 적이 있다.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변경됐지만 당시에는 지지하는 사람도 많았다.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은 알려져 있지 않았고 소위 ‘정조(貞操)’가 법의 보호 대상이던 시절이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혼인빙자간음죄 자체가 폐지됐다. 그만큼 상식이 바뀌고 또 바뀐 것이다. 윤리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세상과 사회에 대한 객관적 인식 위에 그에 맞는 올바른 윤리를 추구해야 한다. 상식도 그와 같아서 사회와 시대의 한계 속에 존재한다.
공동생활의 질서를 구성원 각자의 상식이나 가치관에 무턱대고 맡겨둘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결국 개인의 상식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상식’이 문제다. 여기서 ‘상식’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만 ‘사회’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더 어려운 문제다. 우리는 각자 매우 다양한 층위의 수많은 사회 내지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 그런데 일정한 커뮤니티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상식이 그 커뮤니티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자신의 상식이 일반적이고 우리 사회 전체에 당연히 통용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 사회의 권력을 장악해 그 상식을 남에게 강요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비극이다. 결국 사회에 통용되는 상식이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동의하는 핵심적 가치관에서 찾아야 한다. 사회가 합의한 대표적인 가치체계는 헌법과 법률이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 기본적 인권에 대한 믿음과 존중은 그런 사회적 상식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민주권주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도 이런 헌법적 기본 가치와 상식에 속한다.
그렇다고 법으로 정해진 것은 무엇이든 곧 우리 사회의 상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법으로 규정할 수는 없으며 그런 것이 법치주의도 아니다. 우리는 입법만능주의가 낳은 비극을 역사 속에서 수없이 봐왔다. 법으로 정할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또 어떤 규칙이나 질서를 법으로 규정하면 그로부터 권리와 기득권이 발생하며 그런 권리나 기득권이 남용되면 정의감에 상처를 남긴다. 권리와 기득권이 멈춰야 하는 곳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양보, 관용이 작동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우리 사회의 갈등을 줄이고 사회를 유지하게 해주는 중요한 ‘상식’에 포섭된다. 사회구성원이 동의하는 공통의 상식이 튼튼하게 자리 잡을 때 그 사회의 화합과 질서도 건강하게 유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