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옥죄는 상법 가장 위협적…내년 경영전략 다 바꿔야할 판"

50대 그룹 설문조사

무더기 규제법안 탓에…기업 60% "사업계획 큰 차질"
기업인들 "죄인 취급하는데 경영할 의욕 생기겠나
경기부양책·혁신성장 정책보다 규제 폐지가 더 절실"
기업들은 2020년 팬데믹(대유행)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최근엔 정치권의 기업규제 입법 강행 등으로 경영 환경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경제계에선 “새해에는 기업가 정신을 옥죄는 규제를 대폭 풀어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30일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모습. /한경DB
국내 10대 그룹의 한 기획·전략담당 부사장은 이달 들어 매일 대책회의를 열고 있다. 상법과 공정거래법, 노동조합법 개정안이 한꺼번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당장 내년 경영전략을 다시 짜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는 “규제 대응이 너무 급하다 보니 먹거리 준비는 뒤로 밀린 상태”라며 “이러다 해외 경쟁사에 뒤처져 글로벌 시장에서 도태할까 걱정스럽다”고 토로했다.

기업 70% “한국 경영 환경 나쁘다”

한국 기업인의 의욕이 바닥에 떨어졌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극복했던 기업인들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기업인의 의욕을 꺾는 규제와 반기업정서를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이는 30일 한국경제신문이 국내 50대 그룹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설문에 응답한 그룹(42곳) 중 63.5%는 한국이 해외 주요국에 비해 기업하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답변했다. 7.3%는 매우 어려운 환경이라고 답했다. 해외보다 환경이 좋다고 답한 그룹은 한 곳밖에 없었다. 기업 경영 환경을 악화시키는 요인을 묻는 질문에는 60.6%가 ‘갈수록 늘어나는 규제 및 기업 관련 법안’을 꼽았다. 커지는 반기업정서(18.2%)와 갈수록 나빠지는 대외여건(12.1%) 때문이라는 답변도 많았다.

연말에 처리된 기업 관련 법안에 대해서는 절반 이상(61.0%)이 “사업계획이나 운영전략을 바꿔야 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변수”라고 판단했다. 주요 그룹들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거나 논의 중인 법안 가운데 개정 상법(45.0%)이 가장 걱정된다고 답했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및 대주주 의결권 제한 조항 때문에 외국계 자본 주도로 사외이사가 선임될 수 있다는 우려다. 경제계에서는 경쟁사 임원이 이사회에 들어오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국회에서 논의 중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27.5%)이 걱정된다는 답변도 많았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사업장 내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사업주를 2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하는 등 경영인과 기업에 대한 처벌 수위를 대폭 높인 법이다. 전문가들은 이 법이 산업재해를 방지하는 효과가 크지 않고 기업인들을 위축시키는 부작용만 낳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등 경제계 인사들도 수시로 국회를 찾아 법을 무리하게 추진하면 안 된다고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다음달 8일 임시국회 회기가 끝나기 전 입법을 마무리하겠다고 밀어붙이고 있다.

“내년 투자·고용 늘리려면 규제 없애야”

기업인들은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고 기업 경영을 어렵게 하는 법안 시행 시기를 늦춰달라고 호소했다. 50대 그룹을 상대로 내년 투자 및 고용확대에 대한 영향을 질의한 결과 ‘불필요한 규제 폐지’가 7.8점(10점 만점)으로 가장 높았다. 주요 그룹들은 또 상법이나 공정거래법 등 법안 시행 시기 조정 및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입법 재고(7.3점)가 내년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혁신성장(5.6점)과 정부의 경기부양책(6.4점) 등은 고용 및 투자 확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기업들은 분석했다.일부 기업인은 사회에 만연한 반기업정서를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취임 후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업인들에게 힘을 내달라고 하는 건 난센스”라고 지적했다. 역대 대통령은 거의 매년 연초에 열리는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기업인들을 격려했지만, 문 대통령은 올해까지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다른 중견기업 대표는 “인건비 등 비용은 가파르게 늘고, 경영 활동을 제약하는 규제는 툭 하면 늘어난다”며 “기업하는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굳이 힘들게 경영하고 싶지도 않고, 자식에게 넘겨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토로했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