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소걸음으로 천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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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종의 동물과 연도의 짝을 맞춘 십이지(十二支)는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유래했다. 황도12궁을 표현한 서아시아식 천문도 속의 동물들이 아시아 각지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지역 환경에 맞춰 소소하게 바뀌었다. 소는 십이지가 뿌리내린 모든 지역에서 초기부터 자리를 지켰다. 농경사회에서 노동력과 운송 수단으로 톡톡히 역할을 맡으면서 인간에게 친근한 존재가 된 영향이 크다.
BC 217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 후베이성 윈멍현의 한 고분에서 출토된 죽간에는 “축은 소다(丑, 牛也)”라는 문장이 쥐, 호랑이 등과 함께 등장한다. 동아시아 십이지상을 정립했다는 후한 시대 철학자 왕충이 쓴 《논형(論衡)》에도 소가 대표주자로 언급된다.소는 그 독특한 외양과 행동에서 근면, 희생, 고집의 이미지를 얻었다. 무엇보다 느린 걸음으로 힘든 일을 묵묵히 해낸 까닭에 우직함과 근면·성실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옛날부터 소처럼 뚝심 있게 일해서 자수성가한 사람이 많아서 “소띠해에 태어나면 열심히 일해서 큰 재산을 일군다”는 덕담이 널리 통용됐다. 1980년대까지 ‘소 팔아 대학 간다’는 말도 흔했다.
서양에선 아래에서 위로 치받는 소의 역동적인 모습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읽었다. 주식시장의 상승장이 ‘황소장(bull market)’으로 불리고,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의 한 자리를 황소상이 차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소가 부귀를 가져다준다는 의미는 동서양이 똑같다.
요즘은 소의 ‘꾸준함’을 높이 치던 분위기가 예전만 못한 것 같다. 묵직한 황소걸음보다 가벼운 참새걸음이 더 먹히는 세태다. 뭐든지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조급증까지 겹쳤다. 그러니 차곡차곡 역량을 축적하며 점진적으로 변화를 모색하기보다는 단박에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것을 선호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개인의 행태도 근본 없는 경박함으로 흐르고 있다.올해 신축년(辛丑年)은 흰색에 해당하는 천간 ‘신(辛)’이 붙은 ‘흰 소’의 해다. ‘흰 소’는 불가에서 깨달음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부(富)와 정신적 승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게 없다. 그동안 쌓은 내공과 새 희망으로 천천히 나아가 보자. ‘우보천리(牛步千里·소 걸음으로 천 리를 간다)’다. 서두르지 않고도 뚝심 있게 미래로 나아가는 ‘소의 미덕’이 그 어느 해보다 절실한 때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
BC 217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 후베이성 윈멍현의 한 고분에서 출토된 죽간에는 “축은 소다(丑, 牛也)”라는 문장이 쥐, 호랑이 등과 함께 등장한다. 동아시아 십이지상을 정립했다는 후한 시대 철학자 왕충이 쓴 《논형(論衡)》에도 소가 대표주자로 언급된다.소는 그 독특한 외양과 행동에서 근면, 희생, 고집의 이미지를 얻었다. 무엇보다 느린 걸음으로 힘든 일을 묵묵히 해낸 까닭에 우직함과 근면·성실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옛날부터 소처럼 뚝심 있게 일해서 자수성가한 사람이 많아서 “소띠해에 태어나면 열심히 일해서 큰 재산을 일군다”는 덕담이 널리 통용됐다. 1980년대까지 ‘소 팔아 대학 간다’는 말도 흔했다.
서양에선 아래에서 위로 치받는 소의 역동적인 모습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읽었다. 주식시장의 상승장이 ‘황소장(bull market)’으로 불리고,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의 한 자리를 황소상이 차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소가 부귀를 가져다준다는 의미는 동서양이 똑같다.
요즘은 소의 ‘꾸준함’을 높이 치던 분위기가 예전만 못한 것 같다. 묵직한 황소걸음보다 가벼운 참새걸음이 더 먹히는 세태다. 뭐든지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조급증까지 겹쳤다. 그러니 차곡차곡 역량을 축적하며 점진적으로 변화를 모색하기보다는 단박에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것을 선호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개인의 행태도 근본 없는 경박함으로 흐르고 있다.올해 신축년(辛丑年)은 흰색에 해당하는 천간 ‘신(辛)’이 붙은 ‘흰 소’의 해다. ‘흰 소’는 불가에서 깨달음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부(富)와 정신적 승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게 없다. 그동안 쌓은 내공과 새 희망으로 천천히 나아가 보자. ‘우보천리(牛步千里·소 걸음으로 천 리를 간다)’다. 서두르지 않고도 뚝심 있게 미래로 나아가는 ‘소의 미덕’이 그 어느 해보다 절실한 때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