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에 '불꺼진' R&D…中企 '성장 사다리' 끊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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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2시간제 본격 시행되자300인 미만(5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주 52시간 근로제가 본격 시행된 첫날인 지난 4일 오후 7시30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의 한 중소기업 부설연구소. 50석 규모의 연구소 내부엔 적막감이 감돌았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늦은 밤에 빈자리가 거의 없던 곳이다. 이 회사는 주 52시간제에 맞춰 이날부터 연구소 근무시간을 ‘오전 10시~오후 7시’로 고정했다.연구소에서 만난 김모 부장은 “불 꺼진 연구소를 보면 한국 중소기업의 암울한 미래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글로벌 무한경쟁 속에 해외 경쟁사들은 밤을 새워가며 연구개발(R&D)에 몰두하는 상황”이라며 “주 52시간제로 한국 중소기업의 경쟁력도 서서히 꺼져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오후 7시면 텅빈 제품개발실
"법 어기면서 일 시킬 수 없어
급하지 않은 자체 R&D 축소"
경쟁국 밤샘 연구·개발하는데
'역주행' 정책에 경쟁력 잃어
“신제품·신기술 개발에 영향”
이번주 들어 중소기업들의 불빛은 저녁에 일제히 꺼졌다. 지난해 말로 종업원 수 50~299명 기업에 대한 주 52시간제 처벌 유예기간이 끝나 위반 사업장에 대한 처벌이 시작된 여파다.시화국가산업단지의 한 중소기업 친환경사업부문 박모 대표는 “법을 어기면서까지 R&D를 할 순 없어 시급하지 않은 신제품 개발, 기존 제품 개량 등 자체 R&D를 단계적으로 줄여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대신 당장 수익이 일어나는 외부 용역 과제에 회사 R&D 인력을 집중 투입하기로 했다는 설명이다.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유예 기간 중인 지난해 2월 민간 컨설팅기관으로부터 제출받은 ‘민간기업 R&D 직무에 대한 주 52시간 근로제 개선방안’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50~299인 규모 중소기업 622곳 중 46.7%는 ‘주 52시간제 시행이 신기술·신제품 개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주 52시간제가 ‘R&D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응답도 53.3%로 절반을 웃돌았다.
한 중소기업 연구단체 관계자는 “국가 산업경쟁력을 지키기 위해선 촌각을 앞다퉈 R&D에 몰입해도 모자랄 판국에 정부 제도는 거꾸로 가고 있다”고 성토했다.연장 근로가 필수적인 일부 업체는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기업 쪼개기’가 대표적이다. 판교의 한 산업용 소프트웨어 개발회사 이모 대표는 “기존 직원 4~5명을 내보내 외주업체를 차린 후 그곳에 일감을 분배하는 정보기술(IT) 기업이 최근 부쩍 늘었다”고 전했다. 5인 미만 사업장은 주 52시간제를 적용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주52시간제 도입으로 인해) IT 분야 대기업에서는 ‘하청의 하청’이 일반화됐는데 정부만 모르고 있다”고 했다.
“성장 사다리 끊는 결과” 우려
주 52시간제 계도 기간 종료를 약 3주 앞둔 지난달 9일 국회는 선택근로제의 정산 기간을 ‘신상품 또는 신기술의 업무개발 업무’에 한해 1개월에서 3개월로 연장하는 내용 등을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선택근로제는 근로자가 근로시간을 자율적으로 정하되 정산 기간 내 근로시간 평균은 법정 근로시간에 맞추는 유연근무제도다. 탄력근로제와 달리 하루 12시간 초과 근로가 가능해 R&D, 소프트웨어 개발 등 집중 근로가 필요한 업종에 적합한 제도다.하지만 중소기업 현장에선 선택근로제 적용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경기 성남의 한 광학부품기업의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생산직, 영업직, 연구직이 한데 모여 있는 중소기업 특성상 R&D에만 선택근로제를 제공하면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주 52시간제가 중소기업이 중견이나 대기업으로 커가는 ‘성장 사다리’를 끊는 결과를 낳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이상호 한국경제연구원 고용정책팀장은 “40% 이상이 수주에 의존하는 만큼 중소기업 R&D의 관건은 시의성에 있다”며 “R&D가 위축될수록 중소기업의 성장 가능성도 저해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