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세기 한민족 이주로 '한민족 체제'였던 대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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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산책고대에 우리 민족사의 영역에는 복잡한 성격의 해양소국이 있었다. 대마국이다.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대마도는 누구의 영토였는가?” “누구의 역사였는가?” 한·일 관계는 시작할 때부터 복잡했고, 역사가 진행될수록 숙명적으로 변했다. 그 한가운데에서 상대방의 심장을 겨누는 ‘단도(短刀)’(K. W. J. Mekel 주장), 연결하는 ‘다리’라는 상반된 역할을 한 곳이 대마도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32) 대마국에서 대마도로
일본 야요이문화 여는 계기…마한보다 변한과 교류
부산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대마도
대마도는 남북이 72㎞, 동서가 16㎞, 면적이 714㎢인 비스듬히 누운 고구마꼴이다. 제주도의 3분의 2, 거제도의 2배, 울릉도의 10배에 달하는 큰 섬이다. 부산에서 약 53㎞, 거제도에서는 80여㎞ 거리로 날씨가 맑으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대마도에서 이키섬까지 약 53㎞, 다시 규슈까지는 20여㎞다. 따라서 대마도를 징검다리처럼 이용하면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다. 1노트 내외로 북동진하는 대한난류(쓰시마해류)와 낙조(썰물)의 영향으로 유속은 3노트 이상이 된다. 거기다가 계절풍까지 활용한다면 상호 간 교류는 어렵지 않다. 나는 1983년 8월 ‘해모수’라는 뗏목을 만들어 거제도를 출항했는데, 대마도 북쪽 사고(佐護)까지 불과 4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광의의 ‘한민족 체제’에 속해
대마도의 고시다카(越高) 유적지에서는 약 6500년 전의 융기문 토기들이 발견됐다. 가토(加藤) 해상유적지에서도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됐다. 한편 부산의 동삼동 패총, 울산 서생포 등에서는 죠오몽 토기와 흑요석제 도구들이 나왔고, 근래 여수의 안도 패총에선 규슈산 흑요석이 발견됐다. 이렇게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대마도를 중간기지로 삼아 수천 년 동안 자연스러운 교류와 이주, 초보적인 무역을 했다.그런데 기원 전 3세기 무렵부터 한민족은 일본열도를 목표로 대대적이고 조직적인 이주와 진출을 시도했고, 그 여파로 야요이 문화가 시작됐다. 대마도 안에서 상자식 석관 등 200기 가까운 고분이 발견됐는데 야요이 토기, 자루식 마제석검을 비롯해 창, 모, 검 등 청동제품과 철제품, 각종 농사기구 등 한반도계 유물이 많이 나왔다.대마국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 왜인전에 처음 등장한다. 서기 3세기 전반의 대마국 상황이 나와 있다. 구야한국(금관가야)의 해안을 떠나 대마국(對馬國), 일지국(一支國), 말로국(末盧國), 이도국(伊都國) 등을 거쳐 여왕이 다스리는 야마대국(邪馬臺國)에 도착하는 길과 거리, 항해 방식 및 인구, 특산물 등과 지배자의 이름을 기록했다. ‘대마’라는 이름은 마한의 맞은편에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 대마국과 교류한 주체는 변한이었다.
또 다른 명칭인 ‘쓰시마’는 712년에 편찬된 《고사기》에 기록된 ‘津島(ツシマ)’에서 유래했다. 한국어 ‘두 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밖에 ‘한향지도(韓鄕之嶋)’ ‘대주’ ‘대마주’ 등의 명칭이 있다. 대마국은 비록 ‘왜인전’에 기록됐지만, 그 무렵의 ‘왜(倭)’는 여러 가지 증거로 봤을 때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와 마찬가지로 ‘한민족 체제’에 속했다고 판단한다.
3세기 전반쯤 대마국에는 1000여 호, 즉 5000명 정도가 거주했다. 삼한의 소국들과 비교하고 척박한 자연환경을 고려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데 면적의 88%가 산악지형이고, 농경지는 지금도 불과 4% 정도다. 반면 915㎞에 달하는 리아스식 해안에는 항구가 발달했고, 크고 작은 만들은 수백 척의 선박을 숨기고, 외부세력의 진입을 저지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해양중계 무역에 종사했지만, 식량을 구하기 힘들 때는 해적으로 변신해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섬 안에는 정치세력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