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으로 버림받은 조선 백성의 눈물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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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병자호란 패배 속 죽음과 포로로 버림받은 백성들
병자호란 패배 후 청나라·속방으로 전락한 조선
끌려간 포로 50만~60만명에 달해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한계 드러내

조선은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을 상실했고, 국가의 존재 이유와 역할을 망각한 성리학자들의 나라였다. 광해군의 정책과 같이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를 외교적으로 이용하면 청나라의 공격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인조 정권은 청을 자극해 전면전을 초래했다. 청태종의 친정군 12만명의 선발대가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넘었지만 12일에야 사실을 보고받았던 정부는 무능했다. 더구나 임진왜란의 대참상을 겪고, 정묘호란이 끝난지 불과 9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몰현실적인 자주론자들의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불과 45일을 버티다 항복했다. 승전국과 패전국은 협의 끝에 9개 조항을 만들어 공표했다. 조항으로는 조선은 청나라에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관계를 끊고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등이 있다. 그리고 인조가 항복의식을 행한 삼전도에는 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이렇게 조선은 명나라 대신 청나라의 속방으로 전락했다. 이 같은 상황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의 조인 때까지 이어졌다.

척화파였던 삼학사의 오달제는 심양까지 가는데 60일이나 걸렸고 숱한 고난을 겪었음을 기록했다. 포로들은 만주의 한겨울 삭풍과 눈보라 속에서 굶주림, 매질, 강간 등을 당했고, 일부는 죽음을 맞았다. 사료에는 강화도가 점령당할 당시에도 세자를 포함한 왕족들, 사대부 가족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혔고, 일부 여인들은 능욕을 당하고 자결한 일들이 기록됐다. 이미 정묘호란 때도 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고, 일부는 병자호란 때 적군으로 참가도 했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정부는 포로 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갖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 포로들의 숫자가 기록되지 않은 것을 보면 정부는 능력도 부족했지만, 노력을 크게 기울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돌아온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귀환한 포로를 ‘영웅’으로 환영하는 나라는 자주적이고, 성공한 나라이다. 조선은 그 반대였다. 8년 만인 1645년에 돌아온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조선과 청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조선과 포로들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청국의 크기와 위상을 절감하고, 국제관계의 실상에 눈을 떠 몽골어를 공부했다. 또한 청나라에 와 있던 ‘아담 샬’을 비롯한 천주교 선교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우수한 서양문물을 배웠다. 더불어 자명종, 천문의, 세계지도 등 부국강병에 필요한 서양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한 그의 존재는 성리학자들의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다. 정통성에 위협을 느낀 인조의 냉대와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의 비판과 모함을 받다 결국은 2개월 만에 급사했다. 상황과 세자의 시신 상태, 인조의 태도, 당쟁을 고려하여 ‘독살설’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추잡한 궁중 암투가 일어나면서 인조는 세자빈을 내쫓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 어린 손자인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는데, 결국 둘은 제주도에서 장독과 병으로 죽고, 막내는 효종이 즉위하면서 생존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을 조선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평가한다. 항복한 왕인 인조와 개혁적인 왕위 계승자 간의 권력 쟁탈전을 넘어서 국내파와 포로파(송환파)의 갈등, 성리학과 실용학문(서양학문, 훗날 북학으로 발전)의 대결, 명분론과 실용론의 대결이고, 친명 세력과 친청 세력 간의 대결이었다.
현실로 체험하지 못한 후대인들은 ‘객관’이라는 핑계로 원론적인 잣대로 평하고, 경망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특성이 있다. 나 또한 ‘관찰자’란 자격 미달의 평가자이지만, 역사학자라는 이름을 빌려 비겁한 조선의 사내들을 비판한다. 조선의 왕과 위정자들이며 성리학자인 그들, 남편이며 아비인 그들을 말이다. 그들은 ‘나라(國)’와 백성(民) 대신 ‘충(왕)’을 더 소중히 했고, 가족 대신 가문에 집착해 나라도 가족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죄인들이다. 8년 고생 끝에 귀국한 소현세자 등을 배척하고 죽게 했고, 사지에서 돌아온 환향녀들을 사회에서 매장하거나 자결을 강요했다. 그들은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도, 인정도 없는 부도덕한 죄인들이다.
형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은 인재를 등용하고, 군사체제를 정비하며 북벌을 야심 차게 추진했으나 10년 만에 죽었다.. 이후 비겁한 양반 성리학자들은 통한의 반성과 절치부심의 복수, 부국강병의 실천을 포기한 채 성리학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당쟁에 몰두했다. 그 결과 백성을 더 탄압하고 가렴주구가 심해지면서 조선은 붕괴의 길로 치달았다.때때로 가정해 본다. 만약,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붕괴했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발전과 백성들의 삶은 더 유리하게 변하지 않았을까? 백성을 버리면 정권은 물론이고, 국가도 붕괴하고, 멸망하는 것이 ‘정의’이고 ‘순리’가 아닌가?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