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 시청률 90%' 이란의 반전…'눈 뜨고 코 베인' 한국 [송영찬의 디플로마티크]

40년 우호관계의 반전

이란, 한때 중동 최대 우방국
혁명 뒤 反美·親北 노선에도 우호관계
고강도 제재 속 '돈'이 관계 발목잡아
“서울·테헤란 양시와 양시민의 영원한 우의를 다짐하면서”

서울 강남역 1번 출구에서 나와 걷다보면 도로변에 둥근 표지석이 눈에 띕니다. 표지석은 직선으로 뻗은 널찍한 이 도로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간략한 역사도 소개합니다. 1977년 이란 수도 테헤란의 골람레자 닉페이 시장은 서울을 방문해 서로의 이름을 딴 도로를 제안합니다. 이걸 계기로 ‘삼릉로’라는 다소 평범했던 이 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길 중 하나로 거듭납니다. ‘테헤란로’의 탄생입니다.
서울 역삼동 테헤란로 가로변에 위치한 표지석

○대장금 시청률 90%의 나라

테헤란로는 단순히 서울과 테헤란의 우호 관계만을 보여주는 길이 아닙니다. 이란은 한때 중동 지역의 대표적인 우리 우방국이었습니다. 박정희 정부 당시 이란에만 2만여명의 건설 노동자가 파견됐고, 김종필 국무총리는 1971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이란 건국 2500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했습니다. 당시 관련 소식을 전하는 대한뉴스는 이란을 “우리의 우방”이라고 강조합니다.

당시에 각각 동·서아시아의 대표적인 친미(親美) 국가이자 ‘개발독재’ 국가이던 한국과 이란이 서로를 우방이라 칭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란은 1979년 이전까지 ‘샤’라 불리는 황제가 통치하는 국가였습니다. 당시 팔라비 왕조는 1960년대부터 원유를 수출해 쌓은 막대한 외화를 바탕으로 경제 개발에 나섭니다. 문맹 퇴치·토지 개혁·기업 민영화·여성 참정권·히잡 착용 금지 등 대대적으로 개혁 정책도 펼칩니다. 히잡 없이 여성이 집밖에 나가는 것조차 금지하는 지금 모습만 봐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란은 당시 중동에서 가장 서구적이고 세속적인 나라였습니다. 물가 상승과 개혁 정책에 대한 반발은 결국 1979년 이란혁명을 불러옵니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혁명 위원회는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합니다. 지난 4일 한국 국적 선박 ‘한국케미호’를 나포한 혁명수비대도 이때 탄생합니다. 호메이니가 팔라비 왕조에 충성을 바치던 군부가 혹여나 반(反)혁명 쿠데타를 일으킬까 걱정해 만든 친위대가 바로 혁명수비대입니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SSS)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정규군을 제외한 혁명수비대의 병력만 19만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1980~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병력이 100만명을 넘겼다고 알려져있습니다.
2019년 이란 테헤란 아자디광장에서 이란이슬람혁명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이란혁명수비대 모습. AP연합뉴스
혁명 이후 이란은 대표적인 반미(反美) 국가로 거듭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과는 꽤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이란혁명 이듬해인 1980년 양국 교역액은 12억6000만달러(약 1조4000억원)로 전년(5억2000만달러) 대비 오히려 두 배 이상 늘었습니다. 2010년대 초반 이란은 한국의 중동 3대 수출국이었고 한국은 이란의 4대 교역국이었습니다. 양국 교역규모는 2011년 174억3000만달러(약 19조원)로 최대치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한류 열풍의 중심이기도 해서 2007년 현지에서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은 90% 시청률을 기록했고 2009년 <주몽>은 85%의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핵개발과 경제 제재

미국은 이란과 관계가 틀어진 이후에도 한국과 이란 간의 우호관계를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이란이 군사적 목적으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상황은 달라집니다. 단순 반미 국가와 반미 핵보유국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북한 핵실험에 이란 핵과학자가 참관하는 등 북한과 이란은 핵개발에 있어서도 기술을 공유하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미국은 2010년 5월 ‘포괄적 이란 제재법’을 시행합니다. 이 법은 이란과 달러로 거래하는 외국 기업들도 제재의 대상에 포함하는 것이 핵심입니다.이란과의 교역규모가 워낙 크던 한국은 미국 정부로부터 달러 대신 원화를 이용해 무역대금을 결제하는 방안을 만들어 승인받습니다. 바로 지금 ‘동결자금’의 문제가 된 원화결제시스템입니다. 이란 중앙은행(CBI)은 국내의 기업은행과 우리은행에 원화계좌를 개설합니다. 이란의 수입상이 국내 기업으로부터 물건을 사면, 이란 기업은 이란 중앙은행으로 리얄화로 해당 대금을 입금합니다. 이란 중앙은행은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는 국내 정유업체로부터 원화를 수입대금으로 받았고, 이 금액을 국내 은행의 원화계좌에 예치했습니다.

이란의 핵개발과 제재는 2015년 이란핵합의(JCPOA)로 끝나는 듯해 보였습니다. JCPOA는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주도해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과 독일이 이란과 맺은 합의입니다.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일반 원자력발전 수준인 3.76%로 제한하는 대신 유엔의 대이란 제재를 일괄 종료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당선 직후인 2018년 이 합의를 일방 탈퇴합니다. 경제 제재도 곧바로 재개했는데 제재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강력해졌습니다.

1년여간의 제재 예외 인정 기간이 종료된 2019년 5월, 우리·기업은행의 이란 중앙은행 계좌가 동결됩니다. 이 금액이 자그마치 70억달러(약 7조6000억원)에 달합니다. 이란 멜라트은행이 한국은행에 지불준비금으로 예치한 돈을 포함하면 한국에 묶인 이란 돈은 90억달러(약 9조8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4일 혁명수비대가 한국케미호를 나포한 직후 국내 언론에서는 나포 이유로 이 동결자금의 반환을 노린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자 이란은 발끈했습니다. “오히려 이란 돈을 아무런 이유 없이 인질로 잡고 있는 것은 한국”이라고 말이죠.
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이니. 이란은 이슬람교 지도자가 국가 원수를 겸하는 사실상의 신정(神政) 체제 국가이다. AFP연합뉴스
이란은 2019년 11월 유정현 주이란 한국대사 초치를 시작으로 동결자금과 관련해 한국 정부를 압박해왔습니다. 대통령까지 나섰습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지난해 6월 “한국이 이란에 대해 우리 중앙은행 자금으로 기본재와 의약품, 인도주의적 물품을 구매하는 것을 금지한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한국 정부가 가능한 한 빨리 이 조치를 해제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다음달 외무부는 “워싱턴과 서울은 주인과 하인 관계”라고 원색 비난하며 국제소송 제기 가능성까지 언급했습니다.

협상이 지지부진하던 때, 한국 선박이 나포됐습니다. 해적이 아닌 사실상의 정규군이나 다름없는 국가 조직이 ‘해상 피랍’을 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입니다. 이란은 앞서 모종의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 영국·UAE·인도 선박을 나포한 적이 있습니다. 동결자금 문제가 선박 나포의 원인이라는 것은 자연스레 유추할 만한 사실이었습니다. 한국케미호 나포 후 외교부가 이미 한 달 전 이란이 우리 선박을 나포할 가능성에 관한 첩보를 입수했다고도 전해졌습니다. 선박 나포 주체, 가능성, 이유에 대해 사실상 모두 알고 있는 상황에서 ‘눈 뜨고 코 베인 격’인 것이죠.

○협상의 키는 결국 미국이?

그런데, 이 동결자금 반환을 놓고 선박 나포 전까지 진전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이란 관계에 정통한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이란은 한국에 “동결 자산 가운데 10억달러를 약품과 의료장비를 구매하는데 사용하고 싶다”는 요청을 한 상태로 전해집니다. 외교부 관계자는 선박 나포 이튿날인 5일 “이란 정부가 ‘코백스 퍼실리티’를 통해 코로나19 백신을 확보하려 했고 인도적 거래를 위한 대금을 한국 원화 자금으로 납부하는 것에 대해 미국 재무부도 특별 승인을 내렸다”며 “다만 이란 측이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70억달러 가운데 일부로 백신 구매 대금을 납부하는 논의를 진행했고, 양국이 이 방안에 합의해 한국이 미국 재무부로부터 제재 면제 승인도 받았는데도 무산됐다는 것입니다. 이란이 두 은행 중 한 곳이 ‘미국 제재 때문에 이란 자금이 코벡스 퍼실리티 수금 계좌가 있는 스위스 은행으로 송금되는지 보증하지 못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난관에 부딪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란이 이 자금을 달러로 바꾸기 위해 미국 은행을 거치면 자동 동결될 것을 우려했다는 뜻입니다.

정부는 선박 나포로부터 만 이틀 후인 지난 7일 고경석 외교부 아프리카중동국장을 단장으로 하는 정부 대표단을 이란에 급파했습니다. 이어 10일 최종건 외교부 1차관도 이란으로 떠났습니다. 최 차관의 이란 방문은 당초부터 예정돼 있었는데 이란 정부는 최 차관의 방문이 선박 억류와는 상관없고 동결 자금 해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을 긋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란은 한국케미호 억류가 해당 선박의 ‘환경오염’ 때문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란과의 ‘빅딜’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선박과 선원들의 안전한 귀환, 이란이 원하는 동결자금의 반환을 위해서는 결국 미국이 나서야 한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한국이 자체적으로 동결자금을 반환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이란이 불과 몇 년전까지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한국에 대해 이같은 ‘벼랑끝 전술’에 나서는 것은 결국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열흘도 안 남은 조 바이든 미국 차기 행정부 출범(오는 20일)에 앞서서 미국에는 전향적인 대이란 정책을 압박하고 한국에는 자금 반환을 위해 미국을 더 적극적으로 설득할 것을 압박한다는 것입니다.
서울 테헤란로의 모습.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테헤란로로 상징되는 이란과의 우호 관계는 한국케미호 나포 사태로 파국 위기를 맞았습니다. 선박 나포 직후 외교부 관계자는 “‘창의적인 해법’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외교 당국이 과연 이란과의 외교뿐 아니라 미국과의 외교까지 얽혀있는 이 고차방정식을 하루빨리 풀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