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눈의 문화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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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렬 <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bongham@hanmail.net >새해 벽두에 밤눈이 내렸다. 들떠 있는 손녀들과 동네 놀이터로 나가니 이웃 아이들이 몰려나와 눈놀이에 몰입 중이었다. ‘겨울왕국’ 캐릭터 올라프를 닮은 눈사람 여럿을 이미 만들었고, 올겨울 핫 아이템인 스노볼 메이커로 오리 모양 눈덩이를 찍어내고 있었다. 이제 어린이 문화도 디즈니와 온라인쇼핑이 주도한다. 계속 눈이 펑펑 내린다. 이건 함박눈이야 했더니 눈에도 여러 이름이 있냐고 손녀가 반문한다. “그럼!” 눈의 이름을 열거했는데 싸라기눈과 진눈깨비로 끝이었다. 눈의 종류가 셋뿐일까?
에스키모(정확히는 이누이트)인은 눈의 이름을 20여 가지로 구별해 부른다고 문화상대론자들이 종종 인용한다. 눈 세상인 북극권의 이 명명법은 바로 인류학적 문화의 중요 지표라는 것이다. 서구인들이 ‘시위드’라 뭉뚱그려 부르는 것을 우리는 김, 톳, 파래, 미역 등 십수 가지로 부르며 먹거리로 삼는 걸 생각하면 일면 이해가 된다.그러나 눈 이름에 대한 인용은 이누이트인의 언어 체계를 모른 채 낱말조작을 통해 부풀린 과장이다. 20세기 초 미국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가 최초로 조사 보고한 이누이트인의 눈 이름은 카나, 아푸트, 피크시르포크, 퀴무크수크 네 개뿐이었다. 내리는 눈, 쌓인 눈, 휘날리는 눈보라, 휘날려 쌓인 눈언덕 등으로 분류한 것이다. 어쨌든 북극권 사람들은 눈을 순한지 사나운지, 내리는지 쌓였는지로 구분하는 게 흥미롭다. 사냥 등 생존 활동이 가능한지가 분류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눈’이란 이름은 하나지만 꾸밈말을 붙이면 정말 풍부해진다. 눈의 상태에 따라 진눈과 마른눈, 솜눈과 가루눈, 싸락눈과 포슬눈으로 부른다. 발자국이 겨우 찍힐 자국눈, 땅바닥을 살짝 덮는 살눈, 30㎝ 정도의 잣눈, 사람 키 정도의 길눈은 적설량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다. 내리는 때에 따라 첫눈, 풋눈, 봄눈, 도둑눈(밤눈)으로 부른다. 이 정도면 다양하기로 가히 세계적이고, 분류의 기준도 무척 감성적이며 친화적이다. 문화인류학적으로 평가하자면 우리는 눈을 매우 사랑하는 민족이다.
올해는 이례적으로 자주 눈이 내린다. 큰 눈이 올 때마다 매스컴과 SNS에 많이 언급되는 표제어들은 교통대란, 눈 폭탄, 늦장 제설작업, 바닥난 염화칼슘, 배달 불가 등이다. 뉴스도 “기습 폭설에 당황하는 시민들”로 온통 출퇴근길 걱정뿐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명수필 ‘백설부’는 도회인으로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라고 시작한다. 작가 김진섭은 틀렸다. 현재 대한민국의 도시인들은 눈을 싫어할 뿐 아니라 두려워하고 혐오한다. 동명의 시 ‘백설부’를 쓴 김동명은 눈 속에 태고가 있고, 오막살이가 있고, 내 어린 시절이 있다고 했다. 태고와 오막살이와 어린 시절을, 눈을 사랑하는 나라가 되면 좋겠다. “도둑 같은 잣눈에 기뻐하는 시민들”이라는 뉴스 제목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