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미국엔 없는 '연금 투자 70% 룰'

조재길 뉴욕 특파원
글로벌 금융회사 피델리티가 최근 흥미로운 통계를 내놨다. 자사가 관리하는 미국의 퇴직연금 ‘401k’ 가입자 중 평가액이 100만달러를 돌파한 고객이 작년 9월 말 기준 26만2000명에 달했다는 내용이다. 같은 해 6월 22만4000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3개월 만에 17% 증가했다. 한국의 국민연금과 같은 사회보장연금(소셜 시큐리티) 외에 별도로 적립한 퇴직연금만으로 안정적인 노후를 보낼 수 있는 미 근로자가 그만큼 늘었다는 방증이다.

상당수 근로자가 연금만으로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주식과 같은 위험자산에 장기 투자했기 때문이란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대다수 투자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증시가 급락했던 작년 초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피델리티 측은 “100만달러 이상 연금 보유자 중 상당수는 20년 이상 꾸준히 투자해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美 퇴직연금 주식에 장기투자

미국의 대표적 노후 대비 수단인 401k는 1980년 시작됐다. 미국자산운용협회(ICI)에 따르면 401k 총자산은 지난해 9월 기준 6조5300억달러다. 미 은퇴 자산 시장의 5분의 1 수준이다. 중요한 건 포트폴리오(자산 배분)다. 가입자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위험자산 비중은 연령대별로 78%(20대)에서 56%(60대)까지 다양하다. 401k 보유자들은 평균 67%의 자산을 주식 또는 주식형 펀드에 넣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정부 주도형인 한국식 퇴직연금과 달리 401k는 근로자와 회사가 유연하게 적립 비율을 선택할 수 있는 구조다. 근로자가 매년 일정액을 적립하면 회사가 같은 금액을 매칭 형태로 넣어준다. 기업들은 더 좋은 인력을 채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401k 적립 비율’을 내세우고 있다. 정부 역시 401k의 소득공제 금액을 해마다 높이면서 근로자 스스로 미래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게 결국 국가 부담을 덜어줄 것이란 믿음에서다.

401k는 뉴욕증시를 강세로 이끌어온 원동력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매년 상당한 규모의 신규 연금 자산이 증시로 유입되고 있어서다. 연금 투자가 늘수록 수익률이 개선되는 선순환 구조다.

한국은 주가 뛰면 비중 줄여야

한국에선 사정이 다르다. 위험자산 비중을 70%로 제한하는 엄격한 규제 때문이다. 위험자산엔 개별 종목(주식)은 물론 주식혼합형 펀드, 국채 이외의 채권, 파생결합증권(DLS) 등이 모두 포함된다. 위험자산 비중을 70% 이내로 맞췄더라도 주가가 뛰면 자신도 모르게 ‘법 위반’을 한 셈이다. 추후 포트폴리오를 바꿀 때 이 비중을 축소해야 한다.

불필요하게 불안 심리를 자극하는 것도 문제다. 주식 또는 주식형 펀드 투자가 위험하니 정부가 ‘70% 벽’을 만들었다는 인식이다. 이런 이유 등으로 한국 퇴직연금의 원리금 보장형 상품 비중은 90%에 육박하고 있다. 주요국 중에서 압도적인 비율이다.

정부가 퇴직연금 규제를 푼다고 해서 10% 남짓인 위험자산 투자 비중이 단기간 내 급증할 가능성은 낮다. 규제 폐지는 적극적 투자 성향의 가입자에 대한 운신의 폭을 넓히고, 장기 분산 투자에 대한 사회 인식을 제고하는 조치일 뿐이다.한국 최대 퇴직연금 사업자인 삼성생명의 전체 가입자 수익률(DC형 기준)은 연평균 2.6%에 불과하다. 미국의 연금 사업자들이 고객에게 제시하는 연평균 수익률 5~8%에 한참 못 미친다. 가입자의 86.4%가 예·적금과 같은 원리금 보장형에 넣고 있어서다. 양국 투자자의 수익률 격차는 실력보다 규제의 차이가 아닐지 고민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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