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쟁 후 찾아온 참혹한 기근의 역사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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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전쟁 후에 닥친 자연재앙과 대참상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까지 무려 50년 가까이 처참한 살육 현장을 겪은 조선의 백성들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1670년 전후 전례 없는 자연재앙 발생
경신대기근으로 약 100만명 아사 추정
양 난을 겪으면서 많은 농토가 유실됐고, 노동력은 부족한 형편이었던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에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경신 대기근’이 일어났다. 일부에서는 인구의 4분의 1 정도인 무려 100만명의 아사자가 생긴 것으로 추정한다.
100만명 떼죽음 부른 경신대기근
경신대기근은 세계적 소빙기 현상과 관련된 기후 변화의 산물이란 주장이 있다.(김덕진, 대기근 조선을 덮다) 실제로 실록 등 사료들에 기록을 보면 전례 없는 자연재앙들이 발생했다.1670년에 초봄부터 한양에 눈과 우박이 내렸고, 3월에는 평안도에 운석이 떨어졌다. 1670년 5월 4일 평양 감사인 민유중은 편지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금년 같은 가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실로 국운이 걸려 있어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썼다. 한여름인 7월에도 우박·서리·눈이 전국에 내렸고, 함경도의 피해가 제일 심각했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9월에는 목사가 처참한 피해 상황을 보고하면서 남해안 지역의 식량 지급을 요청했다.(현종실록)다행히 정부는 신속한 조처를 취했다. 벼 등을 운반했고, 유배수들을 육지로 옮겼으며, 세금감면과 특별 과거를 실시했고, 노인들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5월에 이르러서는 경기도를 시작으로 황충, 즉 메뚜기떼들의 공격이 극심했다. 7월에 함경도에서는 황충과 함께 참새(黃雀) 천만마리가 들판을 덮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병충해들이 전국적으로 기승을 떨었다.
그러자 조정도 위기상황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기근 대책을 모색하는 1670년 8월 21일의 어전회의에서 허적은 "기근의 참혹함이 팔도가 똑같아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고 국가의 존망이 결판났습니다"고 말했다. 또한 그 책임이 신하와 임금에게도 있다는 인식을 표현했다. 정부는 7월에 삼남 지방에서 수군의 훈련을 중지하도록 지시했다. 8월에 들어서자 유민이 본격적으로 발생했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실록에서는 "지난해의 흉년은 예전에 없던 것이어서 굶주리고 떠돌아다니다가 죽은 자가 태반이나 됩니다"고 전했다(현종 12년 9월 9일).
신해년에 들어오면서 겨울에 맹추위가 엄습해 사람들은 더욱 많이 죽어갔다. 자연재앙이 계속돼 가옥이 파괴되고, 도로가 유실됐다. 식량 부족으로 기아현상이 만연하면 필수적으로 전염병이 발생한다. 1671년에 “팔도에 기아와 여역(돌림병)과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다 기록할 수 없는 정도였는데 삼남이 더욱 심했다(현종 12년 2월 29일)”는 기록이 남았다. 숙종 때 극성을 부린 구제역인 ‘우역’이 이때도 발생해 8월에는 전국으로 퍼졌다. 당시 황해도에서만 7월 8월에 1만마리 이상의 소가 죽었다. 농사의 근간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곡물값이 폭등했고, 농토가 부족한 해안가와 섬 지역의 백성들은 탈출해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로 인해 수군체제에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 서울도 곡물이 부족한 데다가 교통망의 붕괴로 세곡선들이 입항할 수 없었으므로 식량부족이 심각해졌다. 곡물값이 몇 배씩 상승해 실록에 따르면 2냥 이내인 쌀 한 섬 값이 곧 5냥과 8냥으로 폭등했다(현종 12년 6월 14일). 이제 남은 일은 백성들의 ‘대량 아사’의 현실화였다. '쓰러진 주검이 길에 즐비하고, 맨발에다 얼굴을 가리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사족의 부녀가 날마다 관아 뜰에 가득합니다.(현종 12년 6월 15 일).'는 기록이 있다. 아사자는 1671년에만 10만명가량 됐다고 하는데, 실제는 더 많았을 것이다. 농사용으로 도살이 금지된 소를 잡아먹고, 우역으로 묻은 죽은 소까지 파먹는 상황이었다.
조정은 ‘채취령’을 내려 백성들의 출입이 금지돼선 산에 들어가 솔잎과 껍질을 먹게 허락했다. 사간원의 관리인 윤경교의 상소문에 따르면 이 시기에 기근과 돌림병으로 떠돌다 죽은 사람과 고향에서 죽은 사람을 모두 합하면 거의 100만명에 이른다(현종 12년 12월 5일). 그 직전의 인구가 516만명인 것을 고려하면 25% 정도가 죽은 것이다.
사회는 붕괴 현상이 가속되고, 반인륜적인 일들까지 발생했다. '갓난아이를 도랑에 버리고 강물에 던지는 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한 번 옥에 들어가면 죄가 크건 작건 잇따라 얼어 죽고 있습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시장에서 아이들, 부녀자들, 종들이 개·돼지보다도 못한 값으로 팔려나갔다.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사건도 발생해 충청도에서 어미가 자식들을 삶아 먹은 사건을 구체적으로 보고한 일도 있다. 현종은 버려진 아이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길러 노비로 삼는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아사와 전염병으로 시신들이 많아져 연고 없는 시신들은 길거리에 버려져 파리들과 까마귀, 솔개들의 먹이가 되었다. "성문 밖으로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 시신과 함께 수레로 실려 나가기도 했다((현종실록). 또한 추위 때문에 무덤을 파고 시신의 옷을 훔치는 일까지 발생했다. 거기에다 도성 밖에 있는 관우사당(關王廟)의 사람 형상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는 등의 유언비어들이 난무했다. 이렇게 민심이 불안해지면서 몇몇 관리들이 예측한대로 도적들이 나타났다. 유리걸식하던 백성들은 관곡과 공물들을 강탈했고, 도둑질에 가담했다. 금산에서는 유력한 지방 세력이 포수, 승려들 수백명을 모아 무주 적상산성의 군량곡을 겁탈하려고 모의했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미봉책에 불과했던 정부의 대책
이러한 전대미문의 참상이 일어난 상황에서 정치권력과 학문권력을 독점한 조정의 사대부들은 어떤 자세를 갖고 있었으며, 정책들을 추진했을까?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와 정부가 세금을 받으며, 소수 특권층이 정치와 부를 독점할 때 내건 명분은 비슷하다. 능력자로 자연재앙을 예측해 예방 시설을 만들어 해결하며, 때로는 자기희생을 한다는 점이다.
물론 조정은 참상에 당황하고 한탄하면서 대책을 강구하고, 실천한 점들이 기록됐다. 필요에 따라 기우제와 기청제를 반복했고, 한양에서는 비축미를 풀어 시중가보다 싸게 팔았다. 식구 수를 기준으로 대출도 했다. 또 시전 상인들을 위해 훈련도감, 어영청 등의 군영과 관청이 보유한 비축미까지 팔았다. 그러나 권력과 유착한 특정인들이 사재기한 사건들이 발생했고, 특히 지방의 수령과 향리들이 진휼을 이용해서 축재했다.
정부는 전국에 진휼소를 설치해 죽을 끓여 공급하는 임시방편도 했다. 1671년 1월 16일에 도성 안에 진휼소를 3곳 두었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백성들의 입장을 고려해 용산과 홍제원에다 추가 설치했다. 2월 한 달 동안에 2만명이 얻어먹었는데 80세의 노파가 밟혀 죽은 사고가 일어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 계속됐다(문화콘텐츠닷컴, 데이터 뱅크).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미봉책이었다. 이미 17세기 전반에도 대기근들이 있었고, 16세기 중반에 전염병도 크게 돌았다. 이후 영조 때(1749년)는 인구의 13분의 1 정도인 50만~60만명이 죽어 조선시대에는 총 1000만명 정도가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추정한다. 경신대기근 직후에 발생한 ‘을병(1695년·1696년)대기근’ 등 재난을 조정은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으로 대응하지 않았고, 백성들도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현종이 즉위한 직후부터 대비의 상에 착용할 복식과 기간 문제 등으로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시작됐다. 이는 대기근 동안은 물론이고, 이후에는 피를 부르는 예송논쟁을 펼쳤다. 이때 조선은 도시와 마을의 체계를 바꾸고, 주거환경을 개선해야 했다. 농법을 적극적으로 개량하고, 벼농사 외에 대체 농업을 찾아내며, 산업과 상업을 발달시키고, 다양한 이점을 가진 무역을 활성화해야 했다. 조선통신사들이 본 일본은 이를 실천했지만, 성리학자들은 공리공론으로 정치 권력 쟁탈전을 벌였다. 조선은 끝까지 같은 역사을 반복했다. 민심은 더욱 이반되면서 장길산같은 민란세력들이 나타났고, 임술민란을 거쳐 동학농민 혁명에 이르러 결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기적이다. 우린 그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다. 지금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펜데믹), 경제불안과 생활고, 정치권력 투쟁, 국제환경의 불안정성 등으로 가득찼다. 하지만 후손들에게 ‘경신년 대기근’ 같은 극한 상황을 겪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