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아침시편] 늦게 온 소포 속 눈물겨운 유자 아홉 개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 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고두현 : 1963년 경남 남해 출생.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남해, 바다를 걷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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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쑥스럽지만 제 얘깁니다. 오늘처럼 한파와 폭설이 겹쳤던 그날, 늦게 온 소포를 받고 콧등 시큰거려 새벽까지 시를 쓰게 된 사연…)

그날 밤 늦은 시간에 소포가 도착했다. 폭설 때문에 배달이 늦어진 듯했다. 글씨를 보니 어머니 필체였다. 미리 전화도 안 주시고 웬 소포? 겉포장을 뜯는 데만 한참 걸렸다. 꽃게 등짝 같은 마분지를 벗겨내니 닳고 닳은 내의가 드러났다. 낡은 버선과 장갑도 나타났다. 그렇게 몇 차례 포장을 벗겨내고 보니 아, 그 안에서 쏘옥 알몸을 드러내는 녀석들이란…. 혹시라도 으깨지거나 상할까봐 단술단지 싸듯 아듬고 보듬어서 보낸 남해산 유자 아홉 개였다. 풀어헤쳐 놓은 포장 더미를 내려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

훈장집 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그나마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셨다. 한문도 조금 깨쳤고 어른들이 다 저세상으로 가신 뒤, 열세 살 때 직접 제문을 지으시기도 했다. 그렇지만 자고 나면 바뀌는 한글문법을 제때 따라잡지 못해 편지를 쓰거나 누구네 생일날을 기록할 때는 맞춤법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걸 보고 내가 빙긋거리면 ‘반편이 글’이라도 모르는 것보다는 백 번 낫다며 퉁을 주곤 했다.

편지 속의 맞춤법은 자유자재였다. 그러나 어중간한 글쟁이보다 더 선명하고 사려 깊은 표현이 담겨 있었다. 말하자면 주제가 뚜렷한 글이었다. 눈 뜨고도 코 베인다는 서울에서 그래 고생 많지, 우짜겠노 성심껏 살면 괜찮을 거다, 다른 건 몰라도 건강을 꼭 챙겨야 한다, 그런 내용인데 이건 꼭 틀린 맞춤법 그대로 읽어야 어감이 온전하게 전해진다. 그런데 왜 하필 유자란 말인가. 별스럽지도 않은 과실 몇 개 보내면서 그토록 금이야 옥이야 싸서 보내는 마음이 따로 있긴 하다.
내 고향 남해에서 가장 정감 있는 것을 들라면 두말 않고 유자를 꼽는다. 남해는 섬이어서 농사가 변변치 않고 무슨 장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다에 나가 고기잡는 것도 배가 있어야 한다. 하다못해 갯벌에서 조개를 줍거나 미역을 따서 한 푼이라도 벌어야 애들 공부를 시킬 수 있었다.

유자가 남해의 특산품으로 유명해진 것도 이런 궁핍한 환경 때문이다. 워낙 배고픈 지경에서 그나마 도드라져 보이는 ‘돈나무’였기에 사람들 심중에 특별한 의미로 새겨졌다. 차갑고 억센 바닷바람 또한 유자를 잘 영글게 하는 요인이다.

유자는 남부 해안지방에서만 자란다. 그중에서도 남해 유자는 유독 성장이 느려 묘목을 심어놓고도 오랫동안 기다려야 과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향기가 진하다. 집 뒤안이나 담장 너머에서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유자는 남해의 가을 풍경을 상징하는 진경이다.

요즘엔 남해 마늘과 남해 멸치가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보다 유자에 더 특별한 정감을 갖고 있다. 성장 과정이 남다르고 의미 또한 각별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유자나무 몇 그루만 있어도 아이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해서 ‘대학나무’라고 불렀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대학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북간도까지 갔다가 병을 얻은 아버지가 뒤늦게 고향으로 돌아왔기에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하루라도 몸 편한 날이 없었다.

우연히 남해 금산 절에 갔던 어머니가 ‘날아갈 듯한 컨디션’으로 건강을 회복한 뒤 우리 식구는 모두 절로 삶터를 옮겼다. 나는 그 절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중 1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객지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혼자 다니는 동안 절집에서 ‘중도 소도 아닌’ 어머니가 겪었을 마음고생은 철이 든 뒤에도 미처 헤아리지 못할 만큼 컸으리라.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다른 환경에서 어렵게 키운 아들에게 어머니는 늘 죄스런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어느 해 아버지 제삿날 한 번 속내를 비친 적이 있다. 그런 어머니에게 늠름한 유자나무, 대학나무의 위용은 얼마나 부러운 것이었을까.

내가 객지 공부를 시작한 뒤 본격적으로 불경 공부에 몰두하던 어머니는 몇 년 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셨다. 이미 속세를 떠난 사람이 속가의 아들에게 사사로이 보낸 소포와 편지. 그러니까 위태로운 사회 초년병 시절, 서울살이의 곤궁한 이랑밭에서 막 자리를 잡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그때, 어머니가 큰집에서 얻은 유자 아홉 개를 그토록 귀하게 싸서 서울로 보낸 사연은 내게 삶의 한 상징이자 은유로 깊숙이 각인돼 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는 내게 오래도록 품에서 떠나지 않는 시 한 편을 낳게 해 주셨다. 그게 바로 이 시 ‘늦게 온 소포’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내 곁에 현재형으로 살아 계시며 한 편 한 편 살아있는 시를 쓰라고 등을 다독거려 주신다. 유자껍질처럼 우둘투둘하지만 한없이 따뜻한 그 손으로 향기 깊고 여운이 오래 남는 글을 쓰라고.